제1부 금수공화국(禽獸共和國)

봉하노송(烽下老松)의 절명 ⑦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백설이 휘날리면
먹을 것이 없어진다”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즐겨 불렀던 송지숙.

그미의 애창곡 중엔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이 산하에’도 들어 있었다. 그미가 애절한 목소리로 ‘이 산하에’를 부를 때면 만수는 눈을 감고 감상하면서 1894년 갑오년 춘삼월 백산에 오른 동학 농민군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죽창을 손에 들고, 괭이를 어깨에 메고 기나긴 압제의 밤들을 하얗게 지새웠을 백산성의 동학 농민군. 배고픔에 지친 그들은 처자식과 노부모를 집에 남겨 두고 집을 나섰고, 타락한 관리들의 학정과 수탈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백산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두렵고 무섭지 않았으랴. 언제 어디서 관군의 칼에,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을지 모를 신세였기에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을 떠올리며 하염없이 속울음을 터트렸으리라.

그 소리 없는 통곡소리에 백산 아래 녹두벌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동진강과 고부천도 어찌 울고 또 울지 않았으랴. 동진강과 고부천의 강물도 결사항전에 나선 농민군의 속울음을 들으면서 밤낮으로 함께 울부짖었으리라.

피에 물든 ‘보국안민’의 깃발을 높이 올리고, 불타는 눈빛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빛나던 녹두장군을 따라 백산을 떠나는 농민군의 타는 목마름을 함께 느끼면서 잠시 목이라도 축이고 가라고 시원하고 깨끗한 물 한바가지 퍼주지 못한 죄책감에 어쩌면 동진강도, 고부천도 백 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소리 없이 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갑오년 한 해 동안 시뻘건 피로 물들었던 녹두벌판의 그 참혹했던 현장은 기나긴 세월의 풍화 속에 오간데 없고, 역사적인 기록과 전설을 간직한 유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한 몸 죽더라도 이 나라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기필코 압제와 폭정의 무리를, 국정을 농단하고 국토를 유린하는 외세를 몰아내겠다던 동학 농민군의 피 끓던 함성은 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시나브로 가슴 아픈 메아리로 살아 있으리.

“가세 가세 가보세! 죽어도 죽어도 우리 함께 이 길을 가보세!”

얼핏 들으면 노래인지 구호인지 모를 소리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불의와 폭압이 난무하는 광야로 나섰던 동학 농민혁명군. 그들이 갑오년 초겨울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협공을 당해 숨을 거두면서 외쳤던 그 날의 그 절규가 메아리로 남아 내 귀청을 울리고, 내 가슴을 울리고, 내 영혼을 울리고 있다고 자각하는 사람이 이 붉은 산하에 얼마나 있을까? 만수는 그미가 노찾사의 <이 산하에>를 열창할 때면 그 메아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아리고 쓰려왔다.

이 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기어이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만들어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녹두벌판으로 나섰던 백산 농민군의 후예인 그미는 부안 B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만수와 결혼을 한 뒤 첫 아이인 다함이를 출산한 다음 뒤늦게 대학에 진학했다. 나이 서른 즈음에 늦깎이 대학생이 된 것이다.

서울 S여대 문예창작과 1학년 때 여의도에 있는 한국방송작가노동조합이 운영하는 방송작가아카데미의 TV드라마작가 양성과정을 다니던 중 방송계에 입문했다. 그 뒤 KBC, MBS, 우리소리방송 등 공중파 방송국에서 주로 라디오 구성작가로 활동했다.

그미는 1998년 ‘화개부안(花開扶安)’이라는 시민단체 출범을 이끌었다. 이 단체는 부안 군민들이 중심이 된 새만금 반대 운동을 지원했고, 2003년 늦봄에 시작된 부안반핵투쟁을 돕기도 했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경주 출신으로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은 1891년 5월 경, 세 번째 전라도 순회포교활동에 나섰다. 이때 그의 포교활동의 중심지가 바로 부안이었다.

장맛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그해 7월 어느 날이었다. 최시형은 부안 고을에 사는 제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집 툇마루에 걸터앉은 최시형은 산과 들, 그리고 바다가 어우러진 부안 고을의 독특한 풍광을 바라보다 문뜩 유명한 말을 남긴다.

이날 최시형은 “부안에서 꽃이 피어 부안에서 결실을 보리라(花開於扶安 結實於扶安)”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언급한 것은 ‘부안 땅이 가진 신비로움과 개벽의 땅으로서의 가능성을 함축한 말’이라고 부안 사람들은 받아들였다.

해월 최시형이 부안에서 남긴 ‘화개어부안 결실어부안(花開於扶安 結實於扶安)’이라는 문장에서 지숙은 ‘화개부안’이라는 시민단체의 이름을 지었다. 만수가 잠시 뒤 참석하게 될 동학 115주년 기념 학술행사 준비 모임은 시민단체 ‘화개부안(花開扶安)’이 주최하는 모임이다.

그미가 2004년 국가 폭력에 신음하던 낭주골 부안에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이후, 남편인 만수는 이 단체의 고문을 맡아왔다. 사실 만수는 이 단체의 운영자금을 조달하는 실질적인 후원회장이다.

“야, 이 새끼야! 너 뒈질라고 환장을 했냐, 응?”

‘끼익!’ 브레이크를 급히 밟는 소리에 이어진 택시 기사의 욕지거리에 만수는 눈을 떴다. 용산역 근처 동신당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뒷좌석에 앉은 뒤 술기운에 그만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만수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보니, 택시는 서울시청 광장 옆 1차선 도로 위에 멈춰 서 있었다. 뛰어 내리다시피 한 택시기사와 대한문 쪽에서 시청광장 쪽으로 무단횡단을 하던 남루한 옷차림의 행인이 한바탕 싸우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의 행인은 힘에 밀리는가 싶더니 손에 들고 있던 벽돌로 택시 기사의 머리를 내리칠 기세였다. 택시 기사는 그 행인의 턱 밑에 머리를 들이밀고 ‘죽여! 죽여! 어서 죽여 임마!’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아니, 저런 미친 새끼가 있나?”

만수는 벽돌을 들고 설치고 있는 그 행인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행인의 얼굴을 다시 자세히 뜯어보니, 그는 다름아닌 박정기였다.

깜짝 놀란 만수는 용수철이 튕기듯 택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벽돌을 높이 쳐들고 여차하면 택시기사의 머리를 내리치려 덤비고 있는 정기의 오른손 손목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형! 왜 이래? 제발 정신 좀 차려!”

“야, 이 새꺄! 이 손 못 놔! 얼렁 놔! 나 살고 싶지 않으니까 이 손 노란 말야 새꺄! 어서, 씨발!...”

만수는 정기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벽돌을 간신히 빼앗았다. 서울시청 앞 광장의 출입을 봉쇄하기 위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경찰버스 쪽 도로변에 그 벽돌을 휙 던졌다. 그런 다음 택시 기사에게 만 원 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거스름돈을 받을 겨를도 없이 만수는 왼손으로 정기의 멱살을 잡았다.

만수는 두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정기의 사타구니 사이로 오른손을 쑤욱 집어넣어 등 뒤쪽 허리끈을 거머쥐었다. 그런 다음 정기를 확 들어 올려서 자신의 어깨에 둘러멨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정기는 속수무책이었다.

“너 이 새끼 빨리 안 내려! 내려!...어서 내려!....”

정기는 만수의 어깨 위에서 바둥거리며 악을 써댔다. 만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리번거리면서 빠져나갈 방향을 찾았다.

거스름돈도 돌려주지 않고 택시는 사라지고 없다. 그 때 시청 앞에서 광화문 쪽으로 가는 도로에 일시적인 정체가 일어났다. 2차선 중간쯤에 정기를 둘러멘 만수가 서성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는 차량들마다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댔다. 경적이 어찌나 크고 요란한 지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어떤 운전자는 운전석 옆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만수를 향해 쌍욕을 퍼부어댔다.

그래도 만수는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의 모욕과 수모쯤이야 관심 밖이었다.

문제는 발걸음을 어디로 옮기느냐였다. 광화문 방향 도로를 무단 횡단하자니 왠지 불안했다. 사람 한 명도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경찰버스들 옆에 서 있는 경찰관과 정기가 맞닥뜨리면 필시 무슨 사고가 날 성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뒤로 돌아 중앙선을 넘어 대한문 쪽으로 무단 횡단하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차량도 많고 달리는 차들의 속도도 무서웠다.

“아 씨발, 미치겠네!...”

만수는 결심했다. 일단 경찰버스가 늘어서 있는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런 다음 경찰이 보이지 않는 프레스센터 앞에서 정기를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정기를 어깨에 둘러멘 만수는 어렵사리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차들이 다시 경적을 울리며 몰려왔다.

느릿느릿 서행을 하며 다가오던 차량 안에서 다시 또 삿대질과 쌍욕이 쏟아져 나왔다.

만수는 차량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시청광장 쪽 도로변으로 절뚝절뚝 걸어갔다. 몸체가 큰 관광버스가 옆으로 다가 올 때는 눈앞이 아찔했다. 만수는 경찰버스가 길게 세워져 있는 도로변까지는 일단 무사히 건넜다. 두 사람의 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만수는 힘도 들고 맥도 빠졌다. 그렇지만 어깨 위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정기를 내려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둘러멘 채 신축 중인 서울시청 뒤편 도로를 거쳐 프레스센터까지 걸어갈 작정이었다. 정기를 아무데나 내려놓았다가는 큰 변고가 일어날 것 같은 극심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깨 위에서 악을 써대며 바둥거리는 정기의 몸부림도 장난이 아니었다. 만수는 하는 수 없이 정기를 땅에 내려놓았다.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정기는 만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야 이 새꺄! 너 왜 이래?”

“아 씨발! 지금 누가 헐 소릴 형이 하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구?”

“씨발! 이게 무슨 꼴이여?...형! 미쳤어? 정말 미친거냐구?”

“그래 미쳤다! 그래 이 새꺄 나 돌아버렸다! 지금 내 눈에 뵈는 게 없으니 더 이상 날 건들지 마라! 오늘 너 죽고 싶지 않으면 제발 좀 날 내버려 두라구! 알았냐, 엉!”

“도대체 무슨 일로 무단횡단을 한 건데?”

“야 이 X새꺄! 넌 눈깔도 없냐? 여기 봐라! 시청광장에 분향솔 설치 못허게 경찰뻐슬 어떻게 세워 놨냐?...눈깔이 있으면 저기도 좀 보라구! 시민들이 피눈물을 훔치며 저 대한문 앞에라도 분향솔 설치 헐려는데 저 개새끼들이 그것도 못하게 허잖어! 그래서 이 경찰뻐쓸 뚫고 저 안으로 들어가서 시청광장에다 분향솔 설치 헐려고 그랬다. 이제 감을 잡았냐? 그래 내가 미친놈이냐? 저 짭새들이 미친놈들이냐, 엉?...”

정기는 억세게 틀어쥐고 있던 만수의 멱살을 풀더니 비틀비틀 서울시청 건물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까 만수가 빼앗아서 내버렸던 그 벽돌을 집으러 가는 것 같았다. 만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이고 씨발! 저 화상 왜 또 저러냐!..형!...형!.....”

만수는 정기를 뒤쫓기 시작했다. 비록 정기는 술기운에 몸을 비틀거렸지만 절뚝절뚝 다리를 저는 만수 보다는 달음질 속도가 빨랐다.

앞서서 뛰어간 정기가 벌써 그 벽돌을 집어 들었다. 옆에 길게 늘어선 경찰버스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서 시청광장 안으로 진입하려고 몸을 우측으로 돌리는 것 같았다.

경찰이 백주 대낮에 대로상에서 벌어진 만수와 정기 두 사람의 광란을 지켜보지 않았을 리 만무했다. 아마도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을 경찰이 벽돌을 들고 시청광장 안으로 진입하려는 정기를 제지하고 나섰다. 벌써 십여 명의 의경이 정기의 진입을 가로 막기 위해 에워쌌다.

그 무리의 경찰을 통솔하고 있는 것 같은 경찰간부와 정기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정기는 오른손에 든 벽돌로 경찰간부의 면전에 대고 연거푸 삿대질을 해댔다. 광장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 같았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듯 정기는 경찰간부의 멱살을 왼손으로 잡더니 벽돌을 머리 위로 쳐들고 내리 칠 자세를 취했다.

정기를 에워싸고 있던 의경 여러 명이 합세해서 자신들의 상관인 경찰간부를 엄호했다. 정기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벽돌은 이미 낚아챘고, 정기의 양쪽 팔은 키도 크고 덩치도 큰 건장한 체격의 의경 두 명이 꽉 붙들고 있었다.

“놔아! 이 개새끼들아, 얼른 못 놔!...”

정기는 발버둥을 치며 악을 써보지만 젊고 힘이 좋은 의경들의 완력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경찰간부가 앞에 서서 걸어가고, 의경 두 명이 정기의 양쪽 팔을 붙들고 그 뒤를 따랐다. 몇 미터 뒤에서 그들을 절뚝절뚝 뒤따라가며 만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의경들은 경찰간부의 지시에 따라 서울시청 옆 지하도 입구 근처에서 정기의 양쪽 팔을 붙들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러자 정기는 왔던 길을 되돌아 시청광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경찰간부와 의경들을 향해 쌍욕을 퍼부어댔다.

“야 이 개새끼들아! 니들은 피도 눈물도 없단 말이냐? 씨발, 니 놈들은 양심도 없냐, 엉? 에이 더러운 새끼들!...카악, 퇘!...” 만수는 벌써 저만치 멀어진 경찰을 향해 가래침을 따악 뱉었다.

“형! 그만 갑시다!”

“어딜 가자구?”

“집에 가서 한 숨 자라구요”

“집에 가서 한숨 자?”

“맨 정신으로 덤벼도 계란으로 바위 치길 텐데, 술이 취해서 어떻게 명민국 정권과 싸울건데? 집에 가서 한 숨 자든, 목욕탕에 가서 한 숨 자든 술은 좀 깨고 나서 세상을 뒤엎든, 분신을 하든, 형 꼴리는대로 해야 될 것 아뇨?”

정기는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다. 초여름을 향해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고 있는 듯한 5월 하순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정기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정기를 노려보던 만수가 다시 쏘아 붙였다.

“형도 잘 알다시피 저야 무민국 대통령을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 아니오. 그렇지만 자살이든 타살이든 그 이유가 어떻든 간에 오늘 서거하셨으니 예의를 지켜 명복도 빌고, 고인의 유지도 받들어야 된다고 생각하오. 근데 형의 입장은 나하고 좀 다르잖아. 비록 무민국 대통령 집권 말기에 청와대 앞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하며 얼쑤패 피습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몽니를 부렸지만 그래도 형은 한때 무민국 대통령의 열렬한 팬이었잖아! 나야 그 양반 살아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오만 형은 다르잖소! 그 양반이 대통령이 된 다음에 형을 단 한번이라도 만나 줬는지 안 만나 줬는지 나는 잘 모르겠소만 대통령 당선되기 전에는 그래도 여러 차례 형을 만나 줬다며? 얼쑤패 피습사건의 변호를 자청한 것도 그래서 이루어진 것 아니오? 그런 인연을 갖고 있는 무민국 대통령이 오늘 운명하셨는데, 지금 이게 뭐요?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묻지 말고 형이 직접 그 진실을 파헤칠 수도 있는 것 아니우. 그럴라면 맨 정신으로 덤벼도 쉽지 않을텐데, 이게 뭐요? 대체 이게 무슨 꼴불견이냐구?...”

만수의 강한 질책에 정기는 조용히 눈을 감고 듣고만 있었다. 마치 숯불에 시뻘겋게 달아 오른 불판 위에 오른 짐승처럼 날뛰던 정기는 만수의 질책이 조목조목 맞는 말이라고 인정을 하는 모양이었다.

“형! 정신을 똑똑히 차리고 보시오. 전직 국가 원수가 서거했는데, 이게 뭐요? 시청 앞 광장에다 분향소를 설치 못하게 허니 사람들이 저 저 대한문으로 향하고 있잖아. 저기 좀 보시오. 전철을 타고 시청역에서 내려 분향을 할려고 지상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경찰이 지하도 입구에서 다 틀어막고 있잖아! 상황이 이렇게 삼엄한데 형이 감정적으로, 그것도 술이 떡이 돼서 명민국 정권에 덤비겠다구? 이길 수 있겠소? 허이구,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지!..”

“그만 그만! 니 잔소리 더 이상 듣기 싫으니까 어여 결론만 말해봐, 임마!”

“내 부탁 하나 들어줄 꺼요?”

“무슨 부탁? 말도 안 되는 부탁 헐꺼면 집어 치우고, 얼른 결론만 말해 보란말야!”

“얼른 집에 들어가서 샤워를 좀 하고, 한숨 푹 주무시오. 그렇게 해서 술을 깬 다음 옷을 갈아입고 나오시오. 그 뒤 저기 시청 광장에다 분향소를 차리든, 청와대 앞에 가서 다시 또 분신을 시도하든, 그건 형 맘대로 허시오만 도대체 이 꼬라지가 뭐요? 며칠 세수를 안했는지 모르겠소만 머린 새집이고, 얼굴엔 구정물이 질질 흐르고, 옷은 언제 빨아 입었소? 도대체 이빨을 언제 닦은 건지 원!...이 꼴로 싸돌아다니고 싶소? 이 꼴로 무민국 대통령 영정 앞에 엎드려 명복을 빌고 싶냐고? 그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라면 이런 꼬라지는 절대 안 되지! 지금 형이나 나나 땀 냄새가 장난이 아닌데, 그래도 목욕재계는 하고 분향을 하는 것이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겄소!...”

정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땀방울 속엔 뜨거운 눈물도 섞이기 시작했다. 서럽고 억울해서 뜨거운 눈물을 시울 너머로 쏟아내고 있겠지만 추레한 자신의 몰골을 아프게 꼬집고 있는 만수 때문에 더 감정이 복받쳤는지 모른다.

만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입안에 가득 찬 악담을 좀 더 입 밖으로 토해내고 싶었지만 꾹꾹 참고 목구멍으로 삼켜서 넘겨 버렸다. 잔뜩 풀어헤쳐진 의식의 끈을 정기가 스스로 다시 붙들어 매는 듯 해서.
만수는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만원짜리 지폐 서너 장을 정기의 그 고약한 악취를 품어 내고 있는 개량한복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만수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어 주는 걸 눈물 가득한 눈으로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던 정기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광화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정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만수도 서글프긴 마찬가지였다.

정기의 축 처진 어깨, 푹 숙인 고개, 그리고 접착제가 떨어질 정도로 닳고 닳아서 걸을 때 마다 딱딱 소리가 나는 구두 뒷굽..... 그런 정기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던 만수는 어금니를 앙다물며 프레스센터 앞 도로변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모범택시에 올라탔다.

“기사님! 저기 저 광화문 앞으로 해서 수운회관 좀 갑시다!”

택시 기사에게 행선지를 알리고, 차창 너머로 인도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정기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국화꽃을 들고 서울시청 앞 광장 쪽으로 몰려가는 시민들 사이로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가고 있는 정기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애잔하고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택시는 광화문 네거리를 향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 동상 너머로 저 멀리 청와대 지붕이 만수의 눈에 들어 왔다.

박정기에 비하면 세발의 피겠지만 김만수에게도 저 북악산 아래의 청와대는 한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 아직도 초봄의 연한 풀빛을 조금은 붙들고 있는 북악산을 배경으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는 청와대 지붕을 바라보며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참이었다.

그런데 문뜩, 오늘 아침 서거한 무민국 대통령의 사인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저 청와대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저 푸른 기와지붕 아래엔 오늘 오전 서거한 무민국 대통령이 자살을 한 것인지, 아니면 타살된 것인지,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이 앉아 있을 법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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