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간첩조작 ‘의혹’은 이제 사실로 드러났다. 국가기관이 증거를 조작해 간첩을 만들려고 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몇몇 언론은 아직도 안보 논리를 내세우며 국정원을 걱정하는 행태를 보였다.

지난 2월 중국 당국이 유우성씨 항소심 재판에 제출된 증거가 위조됐다고 밝힌 이후 검찰은 증거조작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약 두 달 간의 수사를 거쳐 검찰은 문서 위조 사실이 드러난 국정원 직원 1명과 국정원 협력자 1명을 구속기소하고, 문서 위조에 가담한 3명에 대해 불구속 기소 처리하는 결론을 내렸다. 검찰 수사팀은 국정원 윗선이 개입한 의혹이나 검찰도 조작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의혹 등을 밝히지 못했지만, 국정원이 간첩을 만들기 위해 증거를 조작했다는 사실은 드러난 셈이다. 남재준 국정원장과 박근혜 대통령도 국정원에 ‘환골탈태’가 필요하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몇몇 언론은 여전히 국정원을 걱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15일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증거 조작’ 사건, 국정원·검찰이 민변에 完敗했다”이다. 조선일보는 “간첩 혐의자와 그의 변호인단이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대공 수사 기능을 해체(解體)시키다시피 한 것”이라며 “국정원의 명예와 신뢰가 이번보다 더 땅에 떨어진 경우도 드물 것”이라고 말한다. 조선일보 눈에는 이번 사건이 국가기관의 ‘조직적’ 범죄행위가 아닌 국정원·검찰과 민변 간의 승부수로 보이는 모양이다. 조선일보 논리대로라면 국정원·검찰과 민변은 왜 싸운 걸까.

   
▲ 15일자 조선일보 31면
 
“유우성씨 관련 사건의 본질(本質)은 그가 간첩이냐 아니냐에 있다. 유씨는 4~5개의 이름을 쓰면서 정체가 불투명했던 사람이다. 그의 동생은 국정원 조사에서 "오빠는 탈북자 관련 정보를 북한 보위부에 넘겨왔다"고 진술했다가 나중에 재판에서 민변 변호인들 설득으로 진술을 번복했다. (중략) 민변은 원래 북한을 두둔하는 행동이 잦았고 공안 수사마다 찾아다니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곤 했다. (중략) 대한민국은 24시간, 365일 적(敵)과 대치하고 있는 나라다. 북이 보낸 간첩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약(暗躍)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 나라의 최고 방첩기관이 변호사 단체에 완패(完敗)하고 말았다.”

조선일보가 이번 사안을 민변의 승리, 국정원·검찰의 완패로 평가하는 이유는 방첩기관을 ‘나라를 위해 간첩을 잡는 방첩기관’으로, 민변을 ‘북한을 두둔하고 공안 수사에 시비를 걸어온 집단’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해석대로라면 이번 사건은 국정원과 검찰이 유우성씨가 간첩임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려는 과정에서 실패한 ‘실수’일 뿐이다.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도 조선일보 논조와 비슷하다. MBC 뉴스데스크는 15일자 2번째 꼭지 <명분도 실익도 없는 증거조작…후유증 크다>에서 “대통령과 국정원장의 사과로까지 이어진 증거조작 사건. 그 후유증은 훨씬 더 크다”며 “국가정보원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무너진 건 물론이고 해외에서 비밀리에 구축해 대북정보망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고 전했다.

배선영 MBC 사회1부장은 “가장 큰 문제는 이제 국민들은 당초 서울시 공무원으로 취업했던 유우성씨가 간첩행위를 했는지 안했는지 알기가 어렵게 됐다는 것”이라며 “진상조사팀의 수사과정에서 선양총영사관의 외교관이 국정원에 협력한 사실을 밝혀냈고, 문서 입수 과정에 관여한 김모 과장과 권모 과장 등 국정원 비밀요원과 협력자들의 신상이 하나 둘 씩 언론에 낱낱이 공개됐다. 수십년씩 공들여 구축한 대북 첩보망이 무너진 상황에서, 이제는 누가 목숨을 걸고 첩보활동을 하려할지 우려되는 대목”이라고 말한다.

MBC와 조선일보의 논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정원이 실수한 거 맞다. 둘째, 그 실수로 인해 간첩 잡는 데 지장이 생기고, 국익에도 피해가 갈 것이다. 문제는 이들 논리에 국가기관의 범법행위로 인해 한 국민과 그 가족의 삶이 파탄났다는 점에 대한 지적이 없다는 것이다. 피해자와 가족들이 입은 상처는 이번 사건의 ‘후유증’에 포함되지 않는다. MBC와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이번 사건의 본질은 유우성씨가 간첩이냐 아니냐”이기 때문이다.

   
▲ 15일자 MBC 뉴스데스크 갈무리
 
동아일보는 더 노골적이다. 동아일보 배인준 주필은 국정원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국정원은 부활해야 한다”고 외친다. 배인준 주필은 북한 무인기가 서울을 휘젓고 다녔다며 “대한민국 정보의 창도 방패도 망가졌다”고 한탄한다. 급기야 “64년 전 김일성이 6.25를 일으킬 때보다 (북한을) 훨씬 더 잘 알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라며 한국전쟁과 1.4 후퇴 이야기까지 꺼낸다. 배인준 주필이 50년 전 이야기까지 꺼내는 이유는 국정원이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배 주필은 “간첩 잡는 수단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까다롭고 제한적이다. 수사 요원들은 차라리 간첩을 놓치는 것이 잡는 것보다 안전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도발이라는 ‘작은 전쟁’을 끊임없이 획책하고 있다. 그 와중에 정보 실패는 안보의 둑을 허물고 말 것이다. 국정원이 부활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동아일보의 논리는 남재준 국정원장의 논리와 닮았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15일 국정원 스스로 ‘환골탈태’의 개혁을 하겠다고 밝혔다. 남 원장이 셀프개혁을 내세운 근거는 안보위기다. 남 원장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NLL도발, 4차 핵실험 위협이 이어지고 있고 다량의 무인기에 의해 우리 방공망이 뚫린 엄중한 시기에 국가 안보의 중추기관인 국정원이 이렇게 흔들리게 되어 참으로 비통한 마음”이라며 “이 위중한 시기에 국정원이 환골탈태해서 새로운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께서 기회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미사일 발사와 무인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 16일자 동아일보 30면
 
이들 언론의 논리대로라면 남재준 원장에게 책임을 묻거나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도 사퇴 대신 ‘셀프개혁’을 맡겼다. 조선일보는 박근혜 대통령이 셀프개혁을 요구한 다음 날인 16일 사설을 통해 “기회는 다시 주어졌다. 남 원장이 이를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자신을 혁신하고 국정원을 진정한 국가 파수꾼으로 바꿔주기를 바랄 따름”이라고 밝혔다.

국정원 간첩조작사건의 1차적인 책임은 증거를 조작한 국정원과 이 증거를 법원에 제출한 검찰에 있다. 하지만 몇몇 언론은 이 사건의 공범이나 다름없다. 지난 2월 중국이 문서가 위조됐다고 밝힌 이후에도 몇몇 언론은 증거조작보다 “국정원의 휴민트(정보원)가 무너질 수 있다. 국익에 손해”라는 식의 보도 행태를 보였다.

동아일보는 지난해 1월 21일 유씨의 간첩 혐의를 최초 보도했다. 이후 증거조작 논란이 일자 동아일보는 북한 회령시 출신 탈북자 김씨를 인터뷰해 유씨가 간첩이 맞다는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유씨 변호인단에 의하면 김씨는 유우성씨 집안과 악연이 있던 사람으로, 재판에도 증인으로 나왔으나 재판부가 신뢰하지 않아 그의 증언은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동아는 이러한 언급없이 일방적인 내용의 인터뷰 기사를 썼다. 증거조작이 사실로 드러나자 이제 “국정원은 부활해야 한다”고 외친다.

박주민 민변 변호사는 몇몇 언론이 국정원의 언론 플레이에 동원됐다는 논란이 일었을 때 “언론이 패거리 의식을 가지고 있다. 언론의 기능은 권력과 국가기관에 대한 비판과 감시인데, 어떤 국가기관과 붙어서 특정 목적을 수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정원 걱정에 여념 없는 언론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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