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글을 써주세요.” ‘2030세대가 처한 현실’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에 덧붙는 말이다. 나는 이런 ‘밝은 글’에 대한 요구를 올해 들어 각기 다른 매체, 다른 사람으로부터 총 세 번 정도 들었다.

요구의 배경에는 잘 팔리는 출판물을 위한 상업 논리, 기업의 자본으로 운영되며 재미를 우선시하는 온라인 매체의 특성, 현실에 대해 경각심을 주되 읽는 독자가 무언가 희망을 발견했으면 좋겠다는 편집자의 선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한두 번 들은 말이면 그냥 여기서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3이라는 숫자는 특별하지 않은가?(feat. 삼 세 판. 삼진 아웃) 세 번 정도 듣다보니 ‘밝은 글’의 함의를 곱씹고 싶어졌다.

‘밝음’은 추상적이다. ‘좋음’ ‘재미’ 같은 말 역시 추상적이다. 하지만 내게 ‘좋은 글’과 ‘재미있는 글’은 ‘밝은 글’에 비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유의미한 사회적 의제를 다뤄 담론 형성에 기여하는 글, 구체적 사례를 통해 현실을 생생히 고발하는 글, 사람들로부터 행동을 이끌어내는 글은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다. 재미있는 글로는 다루는 내용과 화법이 진부하지 않거나, 재치 있는 농담이나 비유를 하거나, 혹은 아예 ‘병맛’ 노선을 택한 글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밝은 글’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2030세대의 현실을 말하는 밝은 글’은 형용모순처럼 느껴진다. 일, 주거, 의료. 결혼, 육아 등 여러 분야에서 요리 보고 조리 봐도 2030 세대에게 주어진 현실은 ‘어둡다’. 이런 현실을 다루면서 희망의 근거를 애써 찾아볼 수는 있겠으나, 내가 발견한 현실 속의 희망은 아직 실낱같다. 이런 현실에 대해 ‘밝은 글’을 쓰라는 요구는 현실의 어려움을 축소하거나 희망의 근거를 과장하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의 어려움을 축소하고 긍정적인 감정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일종의 ‘감정노동’이다. 미국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는 일찍이(1983년) 그의 저서 <감정노동(The Managed Heart)>을 통해 집단 내에서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 배제되고,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집단적 감정을 요구받는 구조에 대해 말했다. 이 때 조직 내의 개인이 의지를 갖고 요구 받은 마음 상태를 생산해내는 일이 바로 감정노동이다. 주로 서비스 노동자를 떠올리게 하지만, 꼭 서비스 노동자에 국한된 일은 아니다. 권력을 갖지 못했거나 적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정노동을 요구 받기 쉽다.

예를 들어 일이 바빠 마음의 여유가 없거나, 부당하거나 불쾌한 일을 당해 딱딱해진 입꼬리를 보며 “XX씨, 무슨 일 있어?”라고 묻는 상사의 질문은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그냥 그걸 말하면 돼)’다. 아무 일도 없다고 답한 뒤 표정이 밝아지기를 기대하고 던진 말로 감정노동을 요구한 것이다. (반면 ‘높으신 분’은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더라도 질문 받지 않는다. 불편한 심기의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이 ‘아랫사람’이 부여받은 숙제다.)

한국 사회 내에서 2030세대 역시 ‘바람직한’ 감정을 요구 받고 있다. 현실이 어려울지라도 의지를 가지고 애써 ‘밝음’이나 ‘긍정’을 유지하라는 압박, 그렇지 않으면 일자리는 주어지거나 유지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 이것은 젊은 세대를 보며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대신 ‘흐뭇함’이나 ‘기특함’과 같은 감정에 빠지고 싶다는 기성세대의 욕망을 기반에 두는 것 아닐까? 하지만 대화나 소통은 서로를 이해할 때,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개선안을 모색할 수 있을 때 의미 있다. ‘답정너’나 ‘감정너(감정은 정해져있어, 너는 그걸 표현해)’의 태도는 제대로 된 소통을 막는다.

   
▲ 최서윤 (격) 월간잉여 발행인
 
사람은 복잡한 존재다. 2030세대도 사람이고, 역시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의 결을 가지고 있다. 2030세대를 타자화하며 자신들 입맛에 맞는 특정 감정을 요구하는 시도는 이제 없었으면 좋겠다. ‘밝은 글’에 대한 의뢰도 이제는 없었으면 한다…고 말하면 앞으로 내게 어떤 의뢰도 오지 않으려나? 좋은 글이나 재밌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계속 고민하고 노력하겠습니다, 편집자· 기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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