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라는 없다. 한 나라의 군사주권을 기약 없이 다른 나라에 내주고도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청와대 대변인이 “덧붙일 말이 없다”고 하는 나라가 나라인가. “2015년 전시작전권(전작권) 전환을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 파기에 대한 첫 반응이 이 정도였으니 애당초 전작권을 가져올 생각이 없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청와대의 첫 반응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하자 뒤이어 나온 것이 안보론이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공약 문제와 관련, 청와대는 “계획된 전환 시기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공약의 철저한 이행보다는 국가 안위라는 현실적 관점에서 냉철히 봐야 할 사안”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같은 날(10월 24일)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발표된 내용이 ‘할 말 없음’에서 ‘국가 안위’로 바뀐 셈이다. 오전에 없던 국가안보를 오후에 써먹는 나라도 나라인가. 

지금까지 전작권의 추이를 보면 그 대답이 나온다. 전작권은 문자 그대로 한반도 전쟁 시 군대를 지휘하는 권한이다. 이 권한은 현재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있다. 이 권한을 미국에게 넘긴 장본인이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이 전 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사령관에게 넘긴 전작권은 6·25 전쟁이후 60년 넘게 미군의 손에 있다. 세계 10대 군사강국이자 60만 대군의 이 나라에 여전히 군사주권이 없다는 자조가 나오는 까닭이다. 

그나마 평시작전권은 김영삼 정부시절인 1994년 미국과의 합의를 통해 찾아왔다. 김영삼정부는 이를 ‘제2의 창군’으로 자화자찬할 정도였다. 그러나 군사주권의 핵심인 전작권의 환수문제는 천신만고 끝에 노무현 정부에서 이루어졌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과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에서 전작권 전환문제가 타결됐고 이듬해인 2007년 2월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2012년 4월 17일자로 전작권을 한국에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그 과정을 돌이켜보면 오늘의 뒤집기를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 모인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제46차 한미안보협의회(SCM) 결과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시계바늘을 10여년 뒤로 돌려보자.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시절이다. 노 전 대통령은 이해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자주국방’을 거론했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군이 자주국방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세계 12위의 경제력도 갖춘 만큼 스스로의 책임으로 나라를 지킬 때가 됐다. 미국의 안보전략이 바뀔 때마다 국론이 소용돌이치는 혼란을 반복할 일이 아니며, 대책 없이 미군철수만 외친다고 될 일도 아니다”는 내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온 나라가 벌집 쑤신 듯 했다.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그릇된 안보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보수언론들은 더 노회한 이유들을 들이 밀었다. 자주국방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외교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나무라는가 하면 자주국방은 엄청난 재원을 요구한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한마디로 자주국방이라는 말 자체가 죄라는 논리였다. 이후 전작권 반환과 용산기지 이전 문제는 뜨거운 폭탄이 됐다. 노무현 대통령조차 ‘자주국방’이라는 용어를 ‘협력적 자주국방’으로 바꾸었다. 

2004년 1월 논란 끝에 용산의 주한미군사령부를 포함한 서울 주둔 미군기지를 모두 한강 이남의 평택·오산 등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자 드디어 안보 폭탄이 터졌다. 나라가 결단이라도 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용산기지 이전은 곧 안보·경제 위기 논리로 이어졌고 노무현 정부의 책임과 정치색깔까지 공방의 대상이 됐다. 보수단체들의 도심시위는 성조기로 뒤덮였다. 심지어 한나라당 의원들 중심으로 국회의원 140여명은 용산의 미군사령부 이전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블랙코미디를 연출했다.  

문제는 2007년의 전작권 타결이 또 다른 시작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 시작은 정권교체와 함께 뒤집기로 나타났다. 어쩌면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첫 뒤집기는 이명박 정부 때였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이 터진 이후 전작권 전환 시기 연기론이 나왔다. 사실 천안함 사건이 아니라도 북한의 2차 핵실험 등 얼마든지 핑계거리는 있었다. 결국 2010년 6월 이명박-오바마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작권 전환 시기를 2015년 12월 1일로 연기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 출범 초기부터 공약파기를 공공연히 시사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작권 전환은 한미연합방위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속내를 비쳤다. 이어 우리 정부가 전작권 전환 재연기를 제안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리고 지난 10월 23일 한미 양국은 2015년으로 예정된 전작권 전환을 사실상 무기 연기하는데 합의했다. 10여년에 걸친 전작권 환수는 이렇게 해서 물거품이 된 것이다. 그것도 용산기지의 미군사령부 존속과 기약이 없는 ‘군사주권의 포기’로 퇴보했다. 

전작권 환수에 대한 옳고 그름이나 찬반 논쟁은 수없이 해왔다. 그러나 전작권이 국가주권의 주요한 요소라는 사실은 만고의 상식이다. 마냥 이를 다른 나라에게 맡기고도 군사주권의 포기가 아닌 안보 때문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자가당착이자 이율배반이다. 미국의 핵우산을 쓰고도 전작권 전환연기가 북한핵 때문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전작권 미환수가 가져올 한국의 대외전략적 부담과 입지의 축소, 그리고 재정적 부담증가 등도 우려스럽다. 용산기지 등의 존속은 국민의 재산뿐 아니라 자존심에도 치명적이다. 전작권 환수는 남북관계 안정에 오히려 유리한 축이 될 수 있다.  

   
▲ 김광원 언론인
 

이러한 상황에서 충분한 국내 논의도 거치지 않은 채 전작권 환수를 무기한 포기하는 결정은 당연히 철회돼야 한다. 국회비준까지 받은 기지이전 문제를 뒤집는 행위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가와 민주질서를 농단하는 행위라는 힐난을 받아도 싸다. 정권의 정치 공학적 접근과 군의 기득권 유지라는 비판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나라는 나라다워야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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