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

이성복 시인은 불행에 대해 이야기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혼자서 불행을 짊어지기 보단 고통을 나 혼자 겪는 게 아니라는 경험, 아픔을 털어놓으며 그 불행과 거리를 두는 경험은 소중하다고 이 시인은 강조한다.

출판사 쌤앤파커스 성추행 피해자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21일 오후 7시30분, 서울 합정 가장자리 협동조합에서 출판산업 직장 내 성폭력 해결을 위한 집담회 ‘함께 말하면 비로소 변하는 것들’에서 이처럼 불행을 서로 나눴다. 이날 모임은 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 서울경기지역 출판분회가 주최했고, 경남 김천 직지농협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인 김모씨 등 60여 명이 참여했다. (관련기사 : 성희롱·인권침해 ‘김천판 도가니’? 동네농협에서 무슨 일이...)

   
▲ 21일 오후 7시 30분, 서울 합정 가장자리 협동조합에서 출판산업 직장 내 성폭력 해결을 위한 집담회 ‘함께 말하면 비로소 변하는 것들’이 열렸다. (사진 =전국언론노동조합 제공)
 

출판사 쌤앤파커스에서 규정에도 없는 ‘수습 17개월’을 보낸 피해자 책은탁(가명) 전 쌤앤파커스 마케터는 정사원 전환을 결정하는 면접날 이 모 상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관련기사 : 쌤앤파커스 성추행 피해자 “회사가 내 트위터까지 뒤졌다”) 검찰은 끝내 이 상무를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로 사건을 끝냈다. 

책 전 마케터는 곽은영의 시 ‘불한당들의 모험 27’를 낭독하면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놀랍게도 이 마른 땅 곳곳에 말뚝처럼 모두들 혼자서 땅을 판다 충분히 괴로웠기 때문에 괴로운 이야기가 싫었다” 책 전 마케터는 “피해자들이 모두 혼자서 숨어있었고 주변 사람들도 충분히 괴롭다며 외면해 정말 혼자였다”며 ”피해자가 겁먹고 숨지 말아야 하고 부끄러운 건 가해자가 돼야한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겁먹고 숨어야 하는 이유는 직장 내 성추행이 인사권을 쥔 권력관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박진희 전국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 서울경기지역출판분회장은 “직장 내 성폭력은 사용자나 상사로부터 당하는 비율이 가장 많고 피해자들 대부분이 문제제기 하지 못했다”며 “가해자 처벌이 부족하고, 문제 해결과정에서 2차 가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했던 박아무개씨는 “직장 상사의 성희롱을 신고하자 팀원 40명이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며 “신고를 담당했던 인사팀에서 나에 대한 허위 소문까지 냈다”고 말했다. 

보통 성폭력 피해자가 용기를 내 문제제기하면 회사 측은 가해자를 내쫓은 것에 대해서만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가해자가 회사를 제 발로 나가는 경우가 많고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자를 내보내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직장상사를 쫓아냈다는 음해까지 당한다는 것이다.

이 활동가는 “출판 노동자들의 상담을 받다가 회사 측의 연락을 받기도 하는데 그분들은 ‘우리 출판사는 페미니즘 서적도 냈었고 상식과 지식을 이야기하는 곳인데 그런 일(성폭력)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말한다”며 “이것이 출판계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출판계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메이데이 출판노동자 계영씨는 “정규직, 비정규직은 회사에서 이름 붙이기 나름이고 계약기간 없이 채용했다가 자르기도 한다”며 “(사용자나 임원들이) 문제를 일으켜 사퇴해도 네트워크가 공고해 별 타격을 받지 않지만 피해자는 2차 가해까지 엄청난 피해를 받는다”고 말했다.  

박 분회장은 “아름다운 메시지를 담는 책은 만드는 과정도 아름다워야 한다”며 “출판노조는 이번 사건을 끝까지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마포 쌤앤파커스 사무실 앞과 경기도 파주 쌤앤파커스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도 진행 중이다. 

   
▲ 서울 마포 쌤앤파커스 사무실 앞과 경기도 파주 쌤앤파커스 사옥 앞에서 1인 시위가 진행된다.
 

김수경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여성위원회 국장은 “우리의 목표는 손상된 인권을 피해 이전으로 회복하고 조직문화를 개선하는 것, 사건에 대한 안내와 기억을 만들고 후속 조치까지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 국장은 “조직 내 언어폭력, 소리 지르는 것까지 다 드러내야 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책 전 마케터는 ‘서커스’라는 시를 읽으며 발언을 마무리했다. “나는 그런 친구가 많다/ 던진 칼을 온몸으로 받는/ 그래도 살아서 내게 나타나는 친구” 그동안 외롭게 싸웠던 그에게 친구가 생긴 날이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