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어느 지방 도시,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큰 도시로 나가고 노인들만 산다. 노인들이 차를 잘 끌고 다니지 않으니 동네 주유소가 모두 문을 닫았다. 기름을 한 번 넣으려면 왕복 80km를 다녀와야 하는데 다녀오는 길에 대형 마트에 들러 생활필수품을 한꺼번에 사기 때문에 동네 슈퍼마켓도 모두 문을 닫았다. 노인들이 소득이 없으니 은행들도 문을 닫았다. 이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의 모든 학문과 상식은 인구가 늘어나는 걸 기본으로 가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구가 거꾸로 줄어드는 상황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홍성국 KDB대우증권 부사장은 최근 출간한 ‘세계가 일본 된다’에서 “인류가 문명을 형성한 이래 겪어보지 못했던 변화를 맞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결국 시간 문제일 뿐 세계 모든 나라들이 일본을 따라 전환형 복합 불황에 빠져들 거라는 암울한 전망이다.

일본에서는 부모가 죽은 뒤에도 사망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부모의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직업 없는 자녀들이 연금을 계속 받으려고 부모의 죽음을 숨기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2020년이면 연금을 받는 인구가 전체의 30%에 이를 전망이다. 지금은 젊은 사람 3명이 노인 1명을 떠받치고 있지만 2050년이 되면 젊은 사람 1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연금 시스템이 작동할까.

   
홍성국 대우증권 부사장.                                                               이치열 기자 truth710@
 

25일 서울 여의도 KDB대우증권에서 만난 홍 부사장은 “고령화라는 단어보다 인구 감소라는 단어가 더 현상을 잘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이미 일본은 지난 5년 동안 100만명 넘게 인구가 줄었다. 일본은 이미 어떤 경제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나라가 됐다. 한국이라고 다른가.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이미 고점을 지났다. 투자와 금리, 물가가 동반 하락하고 있다. 이른바 4저 현상이 본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고령화 속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기업들이 천문학적인 규모의 사내 유보금을 쌓아두고 투자를 하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업 투자가 고용을 창출하고 내수를 키워 경제를 살리는 선순환 구조가 무너졌다. 투자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공급 과잉과 수요 감소, 바닥나는 국가 재정에 반비례해서 늘어나는 복지비용과 극단적인 양극화, 한국은 정확히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다.

홍 부사장은 “거시 경제지표 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지표들이 전환형 복합불황을 암시하고 있는데 아직 한국의 논의는 디플레이션에 관한 논쟁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서 “한국은행은 정통 통화주의자의 경제 논리에 충실한 해석을 내놓고 있고 경제 관료들은 과거 자신들이 경제위기 극복과정에서 성공했던 정책들을 반복해서 시행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과거 일본이 써먹은 방법의 재탕 삼탕이 대부분”이라는 이야기다.

홍 부사장은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한국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5년차쯤에 와 있다”고 말한 것과 관련, “한국의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언급한 것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서도 “1960년 이후 54년 동안 이어왔던 장기 성장 국면이 끝나가고 있다는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홍 부사장은 “한국의 경우 오히려 과거의 성공 경험이 발목을 잡게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홍 부사장이 말하는 전환형 복합 불황은 단순히 디플레이션 뿐만 아니라 구조화된 경제 위기와 사회 전체의 전환이 결합된 개념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과거 성장 시대와 완전히 다른 세계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홍 부사장은 “아직까지는 일본의 상황이 가장 어렵지만 미국과 중국, 북유럽 등 경제적으로 안정된 국가들도 속도는 느리지만 전환형 복합 불황을 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홍성국 대우증권 부사장.                    이치열 기자 truth710@
 

일본 인구는 지난 5년 동안 100만명 넘게 줄어들었다. 국민연금 보험료 미납률이 40%에 육박하고 기금 소진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일본의 주택 6000만채 가운데 13.5%인 820만채가 빈 집으로 남아있다. 시가로 계산하면 무려 50조엔에 이른다. 도쿄 도심에서 30분만 벗어나면 전철 인근의 아파트가 텅 비어 있는 걸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경작을 포기한 농지가 전체 농지의 10%에 이른다. 부동산이 투자 대상이 아니라 골치 덩어리가 된 지 오래다.

이탈리아의 경우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나 된다. 그리스는 실업률이 24%나 되고 재정적자가 GDP(국내총생산)의 175%까지 늘어났다. 스페인에서는 5년 전과 비교해서 기업 대출이 30%나 줄어들었다. 실업률이 24.5%, 청년 실업률만 놓고 보면 53.8%에 이른다. GDP 대비 재정적자가 94%를 넘어 100%를 돌파할 전망이다. 유럽 전체가 아무리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춰도 돈이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져있다.

미국에서는 전체 성인의 20%, 4600만명이 한 번도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산다. 실업률이 5.9%까지 떨어졌다고 하지만 고용률을 보면 58~59%까지 떨어져 있는 상태다. 고속도로 유지 비용이 없어 아스팔트를 걷어내는 사례도 있었다. 중국은 지난 2년 동안 GDP의 12.7%를 경기 회생에 쏟아 부었지만 내수 소비 비중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농민공이 전체 인구의 20%, 2억6000만명이나 되는데 10년 뒤면 4억명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세계 인구는 2050년 90억명을 고점으로 인구가 줄어들게 된다. 부부 한 쌍이 2.1명의 자녀를 낳아야 인구가 유지되는데 대부분의 선진국이 1.5명 미만을 낳고 있다. 한국은 1.06명이다. 1990년에는 대학 입학 지원자가 100만명이었는데 올해는 65만명, 2050년이 되면 30만명까지 줄어들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세계적으로 인구 감소의 재앙이 불어 닥치겠지만 한국은 그 정도가 빠르고 심각하다.

홍 부사장은 한국 경제의 미래 변수를 중국과 통일로 보고 있다. 중국은 임금이 오르면서 성장이 둔화되는 ‘루이스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아직까지 중국은 국가 재정이 튼튼하고 경기부양에 쓸 자금도 충분한 상태지만 중국 역시 고령화의 문제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홍 부사장은 “한국의 통일은 평온한 시기가 아니라 전환형 복합 불황이 강해지는 위험한 시기에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망했다.

홍 부사장은 “일본 극장”이라는 개념으로 일본의 위기를 설명했다. “선진국 진입이라는 사회적 목표를 이룬 뒤의 상실감과 버블 붕괴 이후 장기 침체와 정치적 혼란으로 일본이 극장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재의 문제를 자신의 생활과 분리된 남의 일로 파악하면서 일종의 심리적 의사체험으로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방치하는 상황을 말한다. 일본의 몰락을 남의 나라 일로 여긴다면 역시 극장화의 함정에 빠지는 결과가 될 거라는 경고다.

홍 부사장은 “장기적으로 세계의 어느 나라도 전환형 복합 불황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면서 “전환형 복합 불황을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경기 침체 정도로 인하면 현실과 대응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고 더욱 더 깊은 복합 불황으로 빠져들게 된다”고 지적했다. 홍 부사장은 “당장 내년 경기를 보면 대책이 없지만 30년 뒤를 내다 보고 대책을 세우면 내년 경기에도 도움이 된다”면서 “과거의 성공 스토리를 버리고 변화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홍 부사장은 26일 KDB대우증권 이사회에서 차기 사장으로 내정됐다. KDB대우증권은 지난 7월 김기범 전 사장이 사퇴하면서 4개월 가까이 사장 공백 상태였다. 홍 부사장은 1986년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대우증권 공채로 입사해 28년 동안 재직한 토종 대우맨으로 투자분석부장과 홀세일사업부장(전무), 리서치센터장 등을 역임했다. 증권가의 미래학자로 불리고 언론에도 네트워크가 넓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정환 기자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