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적으로 보자면 동아일보는 유신 체제로 종신 집권을 꿈꿨던 박정희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이 시기 동아일보는 야성이 넘쳤다. 정확히 말하면, 동아일보 기자들이 그랬다. 

동아일보의 박정희 비판은 박정희가 스스로 약속한 민정이양을 뒤엎을 징조가 보이던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박정희는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한 뒤 ‘민정 이양’ 공약을 버리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헌법 개정은 국회를 구성한 다음에 할 수 있다는 반박이 나왔다. 동아일보도 당시 1면 사설 <국민투표가 만능이 아니다>에서 “과연 군정 당국에서 헌법을 개정하는 것이 타당한가”라고 지적했다. 

이 일로 동아일보는 큰 고초를 겪었다. 중앙정보부(중정)는 필자인 논설위원 황산덕을 연행해 조사했다. 또한 동아일보 부사장 겸 주필 고재욱과 황산덕이 마포교도소에 수감됐다. 

1963년 결국 박정희가 민정이양 약속을 뒤엎고 공화당 대선 후보도 나왔다. 그러자 군정에서 내각수반을 지낸 송요찬이 강하게 비판하며 박정희에 공개편지를 띄우는데 이 편지는 동아일보에 실렸다. 송요찬의 <박 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은 동아일보 8월8일자 3면 전체를 차지했다. 

“쓰라린 우리는 부패와 독재 그 어느 것도 참을 수 없습니다.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서 군사지배를 환영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박정희가 대통령 취임 후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진행하자 4·19에 버금가는 데모가 일어났다. 박정희는 반대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첫 희생자는 동아방송 시사프로그램 <앵무새> 제작진이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날인 1964년 6월4일 방송부장 등 3명이 연행되고, 그날 제작과장, <앵무새> PD, 동아일보 외신부장이 연행됐다. 또한 <앵무새> 프로그램 원고가 압수됐다. 

박정희, 동아일보를 겨누다  

6월6일에는 제1공수특전단 소속 무장장교 8명이 동아일보 편집국에 침입해 숙직기자에게 약 40분에 걸쳐 폭언을 한 사건이 일어났다. 동아일보에 대한 테러는 9월에도 또 일어났다. 편집국장 대리 변영권의 집 대문을 누군가 폭파하고, 경찰관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동아방송 제작과장을 납치해 뭇매를 가했다.  

1968년에는 ‘신동아 필화사건’이 일어났다. 신동아 12월호에는 원고지 200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특집기자 <차관>이 실렸다. 이 기사는 박정희 정권이 외국에서 들여온 차관 일부를 어떻게 정치자금으로 돌려쓰고 있는지를 폭로했다. 

   
▲ 신동아 필화사건의 발단이 된 기사 <차관>
 

보도 이후 기사 필진과 실문진이 반공법 위반 혐의 등으로 차례로 중정에 강제 연행됐고, 취재원을 추궁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관>으로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던 중정은 신동아 10월호에 실린 <북과외 중·소 분열> 가운데 ‘남만주 빨치산 운동의 지도자 김일성’이란 대목을 트집 잡았다. 이 일로 부사장 김상만, 편집인 겸 주필 천관우을 연행했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갑자기 12월7일 사고에서 오역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동아일보사사>는 “그동안 본사 사장 고재욱과 문화공부부장관 홍종철 사이에 신동아 사건을 에워싼 담판이 벌어졌는데, 당국이 본사 관련자에 대한 법적 소추를 포기하는 대신 본보는 천관우, 홍승면 및 손세일을 물러가게 한 것”이라고 밝혔다. 

<동아일보 대해부>의 해석은 다르다. 이 책은 “탄압의 손길이 실질적 사주인 김상만에게까지 뻗치자 사장 고재욱은 정권의 대리자인 문화공보부장관 홍종철과 밀실 담판을 하면서 천관우와 홍승면, 그리고 손세일을 제물로 삼아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궁지에서 벗어났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정희와 타협한 경영진, 기사 누락 거듭 

제7대 대선에서 동아일보는 “박정희가 다시 집권하면 총통제로 갈 것”이라는 김대중의 발언을 1면에 보도하는 등 박정희의 장기집권 음모를 보도하고 부정선거 실태를 고발했다. 동아일보는 공직자들이 유권자들에게 ‘선심 공세’를 벌이거나 금품을 제공하는 사례(사설 <공무원 선거 관여 불가>)나 군 트럭까지 동원해서 청중을 실어 나르는 관권선거(사설 <유세와 청중 동원>)를 비판했다. 또한 <행정 피아르(PR) 선거의 실태> 기사를 두 차례 내보냈다. 

하지만 박정희가 위수령을 선포하고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동아일보 경영진들은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권력이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였을까. 

반면, 젊은 기자들은 살아있었다. 서울대 학생들이 반유신독재 시위를 벌이다 구속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 기자들의 노력으로 10월8일자 7면에 1단으로나마 실렸다. 하지만 11일 <경찰 교내 투입>이라는 사회면 기자가 2판에서 자취를 감추는 등 관련 기사가 빠지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 중요한 기자가 누락될 경우 경위를 알아보고 당일 밤 편집국에 모여 가능한 모든 대책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동료가 기사로 부당하게 연행당하면, 즉시 보도하고 돌아올 때까지 편집국에서 기다린다고 결의했다. 그럼에도 기사가 누락되거나 축소되는 일이 반복됐다.

급기야 1974년 고문으로 조작된 민청학련·인혁당 사건이 일어나고, 관련 당사자 8명이 사형을 당하는 최악의 사법살인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들의 최후진술은 물론, 변호인의 변론 내용 단 한 줄도 신문에 보도되지 못했다. 

10월24일 9시30분 기협 분회장이 신호를 보내자 기협 집행부들이 편집국 한가운데로 모였다. 조사부에 근무하던 기자 이계익이 직접 쓴 ‘자유언론실천선언-동아일보사기자 일동’이라는 두루마리를 기둥에 걸었다. 편집국 기자는 물론, 출판국과 방송국 사원들 180여명이 모여들었다. “외부의 간섭을 배제한다. 기관원 출입을 거부한다, 언론인 불법연행을 거부한다.”

   
▲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는 동아일보 기자들.
 

격려광고 쏟아졌지만 결국 쫓겨난 기자들 

광고주들이 동아일보 광고를 거부하는 광고탄압이 시작되자 그 빈자리는 시민들의 격려광고로 채워졌다.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 갈 거야.” “당당하게 버티는 거야. 도깨비는 날이 새면 허깨비가 되나니.”

하지만 동아일보 경영진들은 이미 마음을 돌린 상태였다. 갑자기 사원 20명을 해고했다. 이에 반발한 동아일보 편집국, 출판국, 방송국 기자들이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농성 6일째 되는 날, 갑자기 쇠파이프를 든 폭력배들이 동아일보사로 난입했고 사복경찰들은 사원들을 사옥 밖으로 쫓아냈다. 

동아일보는 이후 권력에 순종하는 길을 걸었다. 언론사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은 셈이었다. 동아일보가 양심적인 기자들을 쫓아내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더라면 한국 사회, 적어도 언론 환경은 지금과 다를지도 모른다. 

부패한 권력은 어디에선가 구멍이 생겨 무너지기 마련이지만 동아일보 경영진들은 기다리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사망한 뒤에도 여전히 ‘유신체제’를 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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