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19일 통합진보당(진보당) 해산을 결정했다. 이로써 진보당은 지난 2011년 12월 5일 창당 이후 3년 만에 사라지게 됐다. 전신인 민주노동당까지 고려하면 14년 된 정당이 사라지게 된 셈이다. 민주노동당을 전신으로 하는 정당은 진보당·정의당·노동당 등 3개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은 한국 진보파 다수의 결집으로 이뤄졌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보냈다.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노동조합운동이 진보정당과 함께 할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보수적인 여·야당에 맞서 제3당의 지위를 점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이는 주효했다. 민주노동당은 2002년 16대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를 내세워 3.9%를 득표했고 이후 2004년 17대 총선에서 10석을 차지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정당 지지율은 13%에 달했다. 하지만 17대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대선후보로 출마한 권영길 후보는 5년 전보다 낮은 3.0%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 민주노동당 사무처 직원들이 지난 2004년 4월 18일 당사 복도를 가득메운 화환을 정리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진보의 결집, 민주노동당

이는 당내에서 책임론을 불러 일으켰고 이른바 ‘일심회’ 사건을 수면위로 꺼내는 계기가 됐다. 민중민주(PD)계열은 일심회 관련자 2명을 제명하는 등의 조처가 없는 한 당의 혁신은 없다고 주장했다. 일심회는 민주노동당 중앙위원이 당직자 수백명의 신상을 북한에 유출했다는 혐의를 받은 사건이다. 검찰은 이들을 간첩죄로 구속기소했다. 

그러나 자주파(NL)계열은 이를 ‘국가보안법에 대한 굴복’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분당이 시작됐다. 조승수 전 의원이 자주파계열을 ‘종북세력’이라 비판하고 탈당하자 민중민주계열의 탈당이 이어졌다. 민중민주계열 대표 격인 심상정, 노회찬 전 의원도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2008년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이후 4년간 이들은 떨어져 지냈으나 양당 모두 이전 민주노동당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총선과 대선을 앞둔 2011년 말 재통합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새정치민주연합)과 선거연합을 맺기 전 단계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을 통합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통합진보당이다. 

진보당은 크게 세 부류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기존 자주파계열이 대다수였던 민주노동당, 심상정·노회찬 등 진보신당 탈당파, 민주당 세력의 한 지류인 유시민·천호선 등 국민참여당이다. 이들은 통합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통합이 제대로 안착되지는 못했다. “선거를 목적으로 뭉친 정당이 분열되는 건 당연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 통합진보당 유시민·이정희·심상정 공동대표. 사진=노컷뉴스
 

선거로 뭉친 정당의 분열은 당연했나 

실제 진보당은 선거 이후 급속도로 분열·붕괴하기 시작했다. 2012년 4월 총선에서 이정희 공동대표가 여론조작 논란에 휘말렸다. 관악을 야권연대 경선에서 이기기 위해 당원들에게 특정 나이대로 답변해달라는 문자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 공동대표는 후보직에서 물러났지만 이미 도덕적 상처를 입은 뒤였다.  

총선 직후에는 비례대표 부정선거가 논란이 됐다. 청년비례 선거인단 선거와 당 비례대표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된 것. 이때 논란의 당사자가 이석기 의원과 김재연 의원이다. 2012년 5월 비례대표 1번 윤금순 당선자가 의원직을 내려놓기도 했지만 사태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러다 5월 12일 진보당 중앙위원회 폭력사건이 터졌다. 12일 오후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중앙위원 500여명과 참관인 400여명 등 9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다른 계열 당원들이 서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 일이 언론보도로 알려지는 등 사태가 커지가 5월 17일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에 대한 강도 높은 혁신이 완성될 때까지 지지를 철회한다”고 결정했다. 

다섯 달이 다 되도록 당내 갈등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진보당은 ‘또’ 분당의 길을 걷는다. 2012년 10월 21일 민중민주계열인 심상정·노회찬 전 의원과 국민참여당 계열의 유시민·천호선 등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의당이 창당된다. 정의당은 진보당에서 탈당한 의원 7명으로 원내 제3당의 입지를 확보했다. 

그해 말 18대 대선에서 진보당은 이정희 대표를 후보로 내세워 반등을 시도했으나 이 후보의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했다” 등의 발언은 오히려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TV토론회 직후 새누리당은 여론조사 결과 지지율 15%인 후보만 토론회 참가할 수 있는 소위 ‘이정희 방지법’을 내놓기도 했다.

   
▲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내려진 19일 헌법재판소 앞. 사진=이치열 기자
 

이정희 관악을 여론조작에 폭력사건까지

2013년은 ‘내란음모’의 해였다. 지난해 8월 28일 국정원은 이석기 의원 등 10명의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내란음모 의혹을 제기했다. 며칠 뒤 한국일보의 일명 ‘RO회합’ 녹취록이 보도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후 재판과정에서 해당 녹취록에 오류가 많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판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현재 이석기 의원에 대한 법적 판단은 2심까지 나왔다. 고등법원은 지난 8월 이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서는 1심 판단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등은 유죄가 인정돼 이 의원에게는 징역 9역, 자격 정지 7년을 선고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해 11월 15일 헌법재판소에 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했다. 

의원 수가 줄어드는 일도 있었다. 국회에서 최루탄을 투척한 혐의로 기소된 김선동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한 것. 대법원 3부는 지난 6월 총포·도검·화약류 등 단속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 의원에 대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지난 7월 재보궐 선거에서 김 의원의 지역구였던 전남 순천곡성에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이 출마했고, 이 전 수석은 새정치민주연합 서갑원 후보를 누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19일 진보당은 사라지게 됐다. 헌법재판소(주심 이정미 재판관)는 이날 오전 10시 정부가 청구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및 정당활동 정지 가처분 신청 사건에 대해 “통합진보당을 해산한다. 소속인 의원들은 의원직을 상실한다”며 해산을 선고했다. 9인 재판관 중 8인은 해산 결정에 찬성했고 김이수 재판관은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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