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에 가면 도우미랑 잘 못 놀지 않냐”

“점심시간에 밥을 많이 먹어서”

“주차위반이 잦아서”

“도대체 내가 왜 해고된겁니까.” 코오롱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묻자 돌아온 대답이 이랬다. 7대 노동조합 간부를 맡았던 최일배(47)씨는 팀장에게서 “당신은 이미 내 선을 떠났다. 이미 노무팀에서 결정이 났다. 그러니까 희망퇴직하고 비정규직이라도 같이 일하는 게 어떻겠냐”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투쟁위원장이다. 

2005년 2월 21일 코오롱은 구미공장 78명, 김천공장 4명을 해고했다. 앞서 1월 878명이 조기 퇴직한 이후였다. 해고 사유는 경영상의 위기. 2004년 코오롱은 재계 23위였다. “재계 23위 기업이 직원 82명 잘라서 경영위기가 해결된다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하세요. 그냥 자르고 싶었던 거예요. 이유를 물어도 제대로 된 답을 못 해요.”

납득할 수 없었던 해고에 ‘한이 맺혀’ 10년을 싸웠다. “내가 정리해고자라는 게 도저히 인정이 안 돼요.” 수가 줄긴 했지만 남은 동료 12명 모두 같은 마음이다. “노래방에 가면 도우미랑 못 놀지 않냐. 그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성치만씨는 16년 동안 지각, 조퇴, 결근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 코오롱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는 최일배 정리해고 분쇄투쟁위원장. 사진=최일배 제공
 
   
▲ 코오롱 불매운동 스티커가 붙여진 맥반석 계란. 사진=최일배 제공
 

“전국 102개 산, 코오롱꺼 아니잖아요”

10년 동안 안 해 본 일이 없다. 단식, 삭발, 3보 1배는 기본이다. 여기에 송전탑 고공농성, 본사로비 점거, 회장 자택 점거 농성, 청와대 앞 타워크레인 고공농성, 코오롱 불매운동이 옵션으로 더해졌다. 특히 호응이 좋았던 건 불매운동이다. “그때 알았어요. 자본은 자본에 실질적인 타격을 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구나.”

한창 등산복이 인기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등산객들을 중심으로 코오롱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관심을 끌기 위해 맥반석 계란도 준비했다. 계란에는 ‘코오롱 스포츠 불매’ 스티커를 붙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등산객들은 계란을 받아가기 위해 줄을 섰다. 그렇게 해서 전국 산에서 나눠준 계란이 4만여 개다. 

‘노래방 해고’ 성치만씨는 사다리를 들고 산에 올랐다. 높은 나무에 사다리를 대고 ‘정리해고기업 코오롱, 코오롱스포츠 불매’ 라고 쓰인 리본을 달았다. “그거 며칠 있으면 코오롱 직원들이 사다리 들고 와서 다 떼버려요. 그런데도 하거든요. 그건 한이에요. 한이 안 맺히면 2미터 사다리 들고 산을 오를 수 없지요.”

반응이 좋은 만큼 코오롱의 대응도 즉각적이었다. 코오롱은 전국 242개 코오롱 매장과 더불어 국립공원 15곳, 도립공원 16곳, 군립공원 9곳 등 전국 유명산 102곳에 ‘코오롱 불매운동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해고자들이 산에서 사람들에게 유인물 등을 나눠줄 경우 하루 100만원을 내게 해달라고 법원에 신청한 것이다. 

법원은 “산에서 불매운동을 하는 것에 사측이 관여하는 것은 너무 광범위하다”며 “산에서 아무 행위도 하지 말라고 지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다만 코오롱을 악질 기업으로 묘사하는 문구 17개에 대해서는 사용금지 조처를 내렸다. “불매운동은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 행사에요. 그리고 전국에 산이 코오롱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지난 2007년 코오롱 창립 50주년 행사장에서 직원들이 이동찬 명예회장에게 절을 하고 있다. 사진=트위터
 

‘항구적 무파업’ 선언하고 회장에 절하는 동료들

‘이긴’ 경험은 많지 않다. 해고 직후 조합원들은 최 위원장을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했으나 노조 선거관리위원회는 해고자를 위원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당선 무효를 선언했다. 이듬해 노조는 민주노총을 탈퇴했고 2007년 코오롱 50주년 행사에서 ‘항구적 무파업’을 선언했다. 파업하지 않는 노조를 선언한 것이다. 그날 3000여명의 임직원은 이동찬 명예회장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큰 절도 했다. 

후회되는 싸움도 있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집에 들어갔던 일이다. 당시 최 위원장과 조합원 10여명은 새벽에 이 회장 집 담을 넘어 사주 자택 점거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이 회장 집에서 한 시간여 동안 노조탄압 중단 및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다 전원 경찰에 연행됐다. 이 과정에서 최 위원장은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동료 3명이 송전탑 고공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는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다들 너무 힘들어했죠. 회장을 만나서 이 싸움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 사는 집인데 그런 식으로 들어간 건 옳지 않았죠. 당시엔 절박해서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건으로 최 위원장은 6개월 수감생활을 했다. 

법도 코오롱의 편이었다. 대법원은 2009년 코오롱의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그 사이 78명에 이르던 구미공장 해고자 대부분이 떠나갔다. 지금 남은 사람은 12명이다. 10명은 생계팀, 2명(최일배, 김혜란)이 투쟁팀이다. 생계팀은 투쟁기금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일을 한다. 그렇게 해서 투쟁팀은 한 달 80만원 정도를 받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회사는 해고자들을 ‘방치’했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지쳐 떨어질거라 생각하겠죠.” 지난 10년간 회사와의 대화는 2006년이 유일했다. 검찰이 부당노동행위 사건으로 코오롱 구미공장을 압수수색한 이후였다. 노조 임원 선거에 회사가 적극 개입한 정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는 복직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교섭은 결렬됐고 다시는 재개되지 않았다. 

 

   
▲ 40일간의 단식을 마치고 서울 동부병원으로 후송된 최일배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투쟁위원장. 사진=이하늬 기자
 

“남은 징검다리, 누군가는 놓아주겠죠?”

지난 달 5일 최 위원장은 과천 코오롱 본사 앞 천막 농성장에서 또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 “숫자가 참 웃겨요. 10년이라고 하면 마지막인 거 같은데 11년이라고 하면 마치 새로운 시작 같잖아요. 10년을 넘겨버리면 자칫 느슨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정말 올해는 끝내야 합니다.” 그는 단식 40일 만에 쓰러져 서울 동부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도 이 싸움이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다. “해고 직후에 78명이 한 자리에 모였어요. 누가 싸워야 한다고 말하더라고요.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하면 석 달 정도 걸리고 ‘재수 없어서’ 중앙노동위원회까지 간다고 해도 6개월이면 끝난다고요. 우리 싸움은 길어야 6개월 싸움이다 그래요. 저도 부인한테 6개월만 참아라, 6개월이면 끝난다고 이야기 했죠.”

처음에는 분명 자신의 처지가 억울해서 싸웠다. 하지만 ‘해고가 정당했다’는 대법원 판결을 받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미래에 올 지도 모르는 경영상의 위기로 근거로 사람을 잘라도 괜찮다고 하고(콜트·콜텍), 회계 조작 논란이 있어도 해고가 정당하다고 하는(쌍용자동차) 법이 정상입니까. 정리해고가 언제든 가능하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도 정리해고의 아픔을 겪는 악순환이 반복될 겁니다.”

그래서 그는 지난 10년이 헛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개울을 건너려면 징검다리를 놓아야 해요. 지금 우리는 거기 돌을 하나씩 놓는거죠. 우리가 부족해서 완성을 못하면 우리 실력은 여기까지구나 하고 인정해야죠. 우리 다음 누군가가 완성해주겠죠. 다만 우리가 포기를 말할 때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한 다음일거에요.” 그는 다시 오는 27일 과천 코오롱 본사 앞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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