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오석 전 경제부총리의 뒤를 이어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맡고 있는 김준경씨의 아버지 김정렴씨(1924년생)는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무려 9년 3개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200년 넘은 대통령중심제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공과를 떠나 비서실장의 전범(典範)으로 불릴 만하다. 김정렴씨가 쓴 정치 회고록 “아, 박정희” 등을 보면 그는 비서실장을 지내는 동안 바깥에서 외부 인사와 점심이나 저녁을 먹은 적이 없다고 한다.

지지율이 끝 간 데를 모르고 추락하는 바람에 비서실장 발탁에 애를 먹은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취임한 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이병기 국가정보원장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그만큼 다급했다는 뜻이다.     

이병기 비서실장은 임명 다음 날인 28일 출근해 수석실별로 업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원래 비서실장 기사는 손바닥만 하게 나와야 한다. 이렇게 언론이 크게 다루는 것도 비정상”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말이 맞다. 그런데 언론은 이병기 비서실장의 임명 사실을 과거 어느 때보다 크게 다뤘다.

박근혜 정권 안에서 그만큼 그의 역할에 거는 기대가 크거나 그가 하게 될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병기씨를 비서실장에 발탁한 박근혜 머리 속에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을 9년3개 동안 지극정성으로 모시느라 몸에 병까지 얻은 김정렴 비서실장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이병기 비서실장이 해야 할 가장 큰 역할이 뭘까? 

많은 언론들은 그가 앞뒤가 막힌 대통령한테 국민들의 생각이나 여론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가교역할을 주문하고 있다. 맞는 말이자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바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일이다. 1981년부터 1993년 2월까지 13년 동안 노태우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모신 이병기씨는 노태우 정부가 북한과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의 의미와 배경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전쟁을 막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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