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에서 전해 오는 한기에 잠에서 깨어,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흘리는 걸 보니 아직 겨울의 끝자락은 곁에 있나 봅니다. 베란다에 나가 빨래를 말리려고 한뼘 정도 열어 놓은 창문을 닫고 들어오니 잠도 달아나버린 깊은 밤, 한 달반 전에 얼어붙은 강원도 주천강의 한 자락을 걸으며 찍었던 사진들을 꺼내봅니다.

벌써 십여 년째 매년 겨울, 가장 얼음이 두껍게 얼었다고 생각되는 좋은 날을 정해서 자연을 아끼는 사람 몇이 모여 주천강 얼음 위를 한나절 동안 걸어 왔습니다. 매해 이 걷기를 안내하고 있는 천문인마을 (강원도 횡성) 정병호 대장의 뒤를 따르면 얇은 얼음을 피할 수 있습니다. 두껍게 얼어붙은 강 얼음 위에 텐트를 치거나 비박을 하고 나서 걷기에 참여하는 기인?들도 있습니다.

   
▲ 주천강 얼음 트레킹. 이치열 기자 truth710@
 
   
▲ 얼어붙은 주천강. 이치열 기자 truth710@
 

평균 기온이 영상과 영하의 경계를 오가던, 그렇게 춥진 않았던 1월 중순. 꽁꽁 언 얼음 사이사이로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봄을 노래하기란 일렀습니다. 3시간여 동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북국에서나 봄직한 백색의 겨울왕국을 걸으며 한 겨울이 선사하는 호사를 누립니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만사 모든 고민을 잊고 발 아래서 부서지는 여러 겹의 얇은 얼음이 내는 소리와 간혹 '쩡!'하며 두꺼운 얼음판에 금가는 소리, 마른 산속에서 들려오는 딱다구리 구멍 파는 소리에 집중합니다. 강가에 쌓인 눈 위로 먹이와 물을 찾아 왔던 고라니, 수달, 족제비, 너구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새들의 발걸음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의 발자국은 우리가 남기는 것이 유일합니다.

   
▲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면서 부러져 솟아오른 얼음판. 이치열 기자 truth710@
 
   
▲ 주천강 얼음트레킹. 이치열 기자 truth710@
 
   
주천강 얼음트레킹. 이치열 기자 truth710@
 
   
▲ 주천강 얼음 트레킹. 이치열 기자 truth710@
 
   
▲ 주천강 얼음트레킹. 이치열 기자 truth710@
 
   
▲ 얼음 위에 쌓인 눈 위에 누워, 잠시 하늘을 바라본 자리에 남은 무늬가 재밌습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두껍게 얼었다가 수량이 줄어들었을때 바위 위에 얼음판이 내려앉으며 만들어낸 형상. 이 두꺼운 얼음이 찢어지며 냈을 소리를 상상해보시죠. 이치열 기자 truth710@
 
   
▲ 주천강 얼음트레킹. 이치열 기자 truth710@
 

미끄러운 바닥과 안전한 발디딤을 위해 용을 쓰고 걷다 보니 이내 몸은 후끈 달아오르고, 땀을 식히자며 너른 바위 근처에 쉴 자리를 잡습니다. 가져온 보온병에서 따뜻한 커피와 간단한 먹거리를 나누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잠시 미뤄놨던 세상의 기쁘고 슬펐던 일들이 자연스레 나옵니다. 차가운 바다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과 추운 굴뚝위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들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눈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이 날의 걷기는 '구름과 학이 노니는 곳'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에서 담백한 손두부찌개를 나눠 먹으며 마무리했고, 다시 돌아온 서울의 밤에는 폭설이 한창이었습니다. 

오늘 밤도 주천강은 겨우내 얼었던 몸을 조금씩 녹이며 얼음 아래를 흐르고 있을 겁니다. 강이 풀리면 그 차갑고 두꺼웠던 얼음은 온데 간데 없고 봄의 싱그러움이 온통 그곳을 채울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1년 뒤, 투명하게 얼어붙은 공기를 마시며 맑은 마음으로 얼음 위를 걷게 될 그날을 기다릴 겁니다. 

   
▲ 눈 위에 남은 동물의 발자국. 이치열 기자 truth710@
 
   
▲ 강이 풀리면... 이치열 기자 truth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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