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필자가 페이스북에 4월 17일 오후에 쓴 것을 전재한 글입니다 )

JTBC가 아니, 손석희 앵커가 뭇매를 맞고 있다.(손석희가 없는 JTBC라면 이런 논란 자체가 무의미하기에). 경쟁하는 언론사가 갖고 있던 걸 '비열한 방법'으로 가로챘으니. 반성의 자세를 폄훼할 수 없으나 공식 견해표명 또한 솔직함과는 거리가 있으니. 매를 맞아 싸다. 다만, 언론사 밥을 20년 이상 먹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매는 어느 정도가 적절하며, 어디에 가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체적 진실과 국민의 올바른 판단, 취재윤리, 사생활 보호 등이 한 데 맞물려 그냥 분위기에 편승해 회초리 하나 보태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손석희는 경향신문이 주장하는 '취재 음성파일 절도사건'의 피고인으로 '언론법정'에 섰다. 스스로도 무죄 주장을 할 수 없을 만큼 그 행위의 부도덕성에는 이견이 없다. 단지, 손석희가 그런 행동을 한 데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전혀 없을까에 대해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파렴치범이나 살인범에도 변호가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테니. 게다가 이번 사안에는 언론사간 다툼 차원을 넘어, 언론 본연의 자세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대목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손석희가 굳이 부탁하지도 않은 변호인의 관점에서 이 글을 적는 이유다.

'성완종 게이트'에는 내로라하는 등장인물이 즐비하고, 논란거리도 많아 무엇이 뿌리고 곁가지인지 단단히 챙겨보지 않으면 본질이 실종되기 쉽다. 그 본질은 딱 하나, 권력형 부정비리다. 진상을 파헤치다보면 비자금, 뇌물, 분식같은 경영비리 등이 고구마줄기처럼 엮어나오겠지만. MB 정부의 부패한 자원외교의 떡고물을 챙긴 혐의를 받는 성완종과 그와 유착된 권력자들의 실체가 무엇인가가 핵심이다. 권력형 비리가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소중한 국고를 얼마나 허비했는지를 밝히고 재발을 최소화하는 것이 언론이 늘 주장하는 본연의 자세이자 공공성이다. 손석희를 단죄하는 핵심적 기준 또한 바로 이것이어야 한다. 언론의 취재윤리 시비 또한 여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몇 시간 빨리 독점 보도를 하려는 욕심에 비윤리적 행위를 마다지 않고 ‘알 권리’라는 숭고한 단어를 들이댄 것 자체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대목에서 성완종 음성파일의 성격을 엄격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당사자가 고인이 된 터여서, 이 글이 한 인격체로서 고인의 죽음이 갖는 고귀함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먼저 밝혀야겠다.) 그것은 권력형 비리에 연루된 혐의로 수사를 받는 사람의 일방적 주장이다. 그것도 자신의 돈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필사적인 구명 노력을 펼치다 좌절한 나머지 폭로한 것이다. 죽음을 앞둔 폭로라 신빙성이 높다고 보지만, 평소 언론의 유지하는 기본적인 보도준칙에 비춰볼 때, 충분한 검증없이 대대적으로 보도할 성격이 아니다. 내가 박근혜가 밉고, 이완구가 한시라도 빨리 물러나야 한다고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언론의 정도가 아니다. 만약 그런 보도가 정당화된다면, 고인이 된 노무현에 막말을 해댄 조현오나 그걸 빌미로 노무현 죽이기에 쌍심지를 켠 언론들까지 면죄부를 받게 된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수사 결과조차도 신중하게 판단해 보도해야 하는 게 언론의 의무로 점차 자리잡아가고 있다. 더욱이 성완종은 자신의 구명에 힘을 보탤 수 있는데도 등을 돌린 현재의 권력자들에 대한 배신감에 따른 폭로를 했다. 그런 자신이 잘 나가던 때인 MB 정권 시절 권력자들은 얼마나 많은 돈으로 구워삶았을까 하는 추정은 자연스레 가능하다.

   

▲ 손석희 JTBC 보도담당 사장. ⓒ JTBC 홈페이지

 

 

그렇다면, 언론의 가장 바람직한 보도 태도는 어때야 할까. 최대한 자체 취재를 통해 그의 폭로가 사실인지를 검증하고 일정 수준의 신뢰가 확보됐을 때 보도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또는 이번처럼 폭로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검증할 만한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국민들에게 최대한 일찍, 가장 투명한 형식으로 밝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설령 내가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판단의 자료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해석을 앞세우는 건 바람직않다. 충분한 자료가 먼저 제공되고 거기에 그 언론사의 시각과 분석이 따르는 게 정도다. 한겨레라고 해도 이런 원칙은 당연히 지켜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손석희가 16일 클로징멘트를 통해 말한 “시청자들의 진실 찾기에 도움이 된다”거나 “가능하면 편집 없이 진술 흐름에 따라 공개하는 것이 공익에 부합한다고 봤다”는 해명을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고 일축하기는 어렵다.

성완종은 기댈 데가 전혀 없는 우리 사회의 힘없는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권력자들에게 돈을 뿌리고 기댄 사람이다. 언론은 그의 말을 검증할 책무가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검증이 힘들다면 성완종의 음성 녹음은 최대한 원본 그대로 공개되는 게 필요하다. 만에 하나, 공익적 성격이 아닌 개인 관련 얘기나 명예가 훼손될 만한 사안이 있다면 선택적으로 비공개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게 타당하다. 결국, 언론 본연의 책무가 국민들이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도록 돕는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손석희에 대해 일방적으로 돌을 던지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언론사간 도의를 훼손한 부도덕한 행위이지만, 공익 측면에선 음성 파일을 공개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 욕심을 줄이고 경향신문의 전문 공개 이후에 음성 파일을 공개했더라면 하는 것이 사후에 얻는 교훈이 아닐까 싶다.

자연스럽게 그 다음 비판인 ‘유족의 동의를 얻지 않고’ 또는 ‘유족의 반대 의사에도’ 무단으로 방송했다는 대목으로 넘어간다. 이 비판은 타당성이 더 떨어진다. 이번 폭로는 단순한 사인간의 대화가 아니다. 고인이 가족들에게 남긴 유언 또한 아니다. 공적 성격의 발언은 제기된 이상, 그 누구도 공개를 하라 마라고 할 권리가 없다. 공적 사안에 관한 말은 입밖으로 나온 순간 공적 자산이 되는 것이다. 발언 당사자에게도 그런 권리는 없다. 그럼, 발언의 텍스트는 공적 자산인데, 음성 파일이나 비디오 파일은 누군가의 허가를 얻어야 공개할 수 있는 사적 자산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유족의 소유물도 아니며, 경향신문이 그 파일을 갖고 있었다고 해서 경향신문의 소유물도 아니다. 설령 당사자가 나중에 반대했다손 치더라도 이런 공적 발언은 공개하고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책무다.

유일하게 남는 윤리적 문제는 ‘취재원과 약속’을 깨는 행위냐 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도 이번 폭로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보도를 원한 사회적 발언이니 손석희를 크게 나무랄 일은 못된다. 유족의 의사를 묻는 예의 정도는 갖추는 게 더 바람직할 따름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사안, 가족간의 내밀한 부분에 관한 대목에 대한 배려가 필요할 뿐이다. 유족의 반대를 이유로 이런 중대한 판단 근거를 공개하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언론의 책무를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이번 파일 공개에서 정말로 신중하게 고려했어야 할 대목이라면 특정인의 일방적 폭로가 국민들에게 마치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위험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무리 내가 박근혜가 밉고, 이완구 김기춘 홍준표가 아웃돼야 한다고 믿더라도 말이다. 내 주장을 펴는 데 도움이 되는가, 장애가 되는가를 따져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건 이미 언론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손석희는 “파일이 검찰에 넘어간 이상 공적 대상물이라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파일이 물건 자체가 아닌 성완종의 폭로를 말한다면, 단언컨대 그 음성 파일은 만들어진 순간 공적 자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엄정하게 본다면, 유족 동의를 앞세워 공개를 미룬 경향신문의 태도는 독점 상태를 지속하기 위한 핑계에 가깝다. 물론, 한겨레가 같은 상황에 놓였더라도 그런 유혹을 뿌리치기는 어려웠겠지만.

‘음성 파일 가로채기’라는 수단은 비도덕적이지만, 이번 사태의 진실 찾기라는 궁극적 가치에는 도움이 된다는 손석희의 해명이 터무니없는 궤변이라고는 나는 생각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단지 시청률의 달콤함이란 한 순간의 유혹 때문에 손석희가 그동안 쌓은 신뢰를 단박에 허물 수도 있는 그런 비윤리적 행위를 용인하고 얄팍한 계산으로 이번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다고는 나는 생각지 않는다. 정권의 나팔수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깨고 종편을 공영방송보다 더 신뢰받는 매체로 변모시킨 그의 소신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은 버릴 필요가 없다. 피고인의 얘기를 들지 않고도 동원 가능한 변호인의 추론이다.

잠깐이나마 손석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 게 있다면, 언론의 과도한 욕심일 터이다. 언론 본연의 자세를 한참 넘어 '독점 욕심'을 과도하게 부린 경향신문의 태도 또한 지적받을 필요가 있다. 이번 사안의 본질과 무관하게 경쟁사들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고 언론의 취재윤리를 무디게 만든 데 적잖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한겨레 기자가 경향신문이 잘 되는 데 배 아파 이런 주장을 한다고 오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 연합뉴스

 

 

성완종이 숨진 때(지난 9일)부터 그가 한 얘기를 있는 그대로 접하기(15일)까지는 엿새 넘게 걸렸다. 경향신문이 예정대로 공개했다면 하루 가까이 더 걸렸을 것이다. 국민들의 올바른 판단을 돕기 위해서라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린들 무슨 문제가 있을까. 또 더 엄정한 보도를 위해서 그런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한 언론사의 지나친 ‘독점 보도 욕구’로 촉발됐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경향신문이 독자적으로 엄청난 땀과 시간을 투입한 탐사취재를 통해 밝혀낸 특종 보도라면 가로채기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성완종이 절박한 나머지 친분이 있는 경향신문 기자를 통해 폭로했다는 것만으로 장시간 배타적 권리를 고수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기에 그 행위의 비윤리성에 대한 인식도 무뎌질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요즘은 신문사들의 수개월에 걸친 땀이 배인 탐사보도도 큐레이션이니 하면서 마음대로 가져다쓰는 '디지털 소매치기'가 횡행하는 시대가 아닌가.

성완종이 누구를 통해 폭로 또는 진술을 했던 그것은 이미 공적 자산이다. 국민들의 알 권리의 영역에 속한다. 이번처럼 그가 궁지에 몰려 언론을 먼저 찾지 않더라도, 그가 사실을 털어놓도록 갖은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게 언론 본연의 책무다. 다른 걸 모두 차치하고, 성완종의 뜻을 그대로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전달되는 것을 원했다. 발언의 배경과 맥락, 구체 진술이 있는 그대로 전달됐다면 그의 폭로가 갖는 신뢰도는 지금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다. 마치 게임이나 하듯이 자신의 발언을 조각조각내 공박의 자료로 쓰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건 국민이 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완구를 궁지에 모는 게 통쾌했을지는 모르지만.

벼랑 끝에 몰려서야 억울한 희생양이라는 성완종의 하소연, 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야 할 국민의 권리, 언론이 지켜야할 본연의 자세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지점이 어딜까. 이번 논란을 계기로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