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범 감독은 데뷔작 <무산일기>에서, 지독히도 살아가기 힘든 남한 자본주의 사회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고 들었다. 탈북자인 주인공은 무엇을 해도 되지 않는다. 조폭 같은 조직은 그를 공짜로 부려먹으려고 하고, 탈북자 친구들은 그를 ‘등쳐 먹으려’(?) 하는데, 남한 사람들은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다.

외모만큼이나 순진한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 때문에 순수를 접고(그래서 그 표시로 더부룩한 머리를 자르고 양복을 입은 채) 자본주의 사회에 전적으로 투항한다. 친구의 돈을 빼돌린 것. 무산(無産) 계급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을 부추기는 사회. 어울리지 않는 양복을 입고 그녀와 노래방에서 일을 하는 승철은 지금도 잘 하고 있을까?

지금, 승철의 삶을 보고 싶다면 박정범의 신작 <산다>를 보면 된다. ‘산다’라는 단어의 의미. 영어 제목으로는 ‘Alive.’ ‘살아있는.’ 과연 이 땅에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인공 정철의 삶은 한 마디로 전쟁이다. 영화의 배경은 강원도 정선. 자본주의 삶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서울을 떠나 왜 감독은 이 산골로 온 것일까? 그곳에는 서울로 가지 못한 인간, 그래서 더 고통스러운 인간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 박정범 감독 영화 <산다> 포스터

 

 

산사태로 부모가 죽어 자기 손으로 발굴해 직접 묻은 정철에게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누나와 조카가 있다. 공사판에서 일한 돈을 친구가 돈을 받아 도망가는 바람에 그와 그 패거리들은 돈 없이 겨울을 나야 할 판이다. 잊을 만하면 누나는 사고를 친다. 사랑하는 연인과는 결혼할 수 없다. 돈을 벌어 집을 고치고 싶은 욕망은 그저 꿈에 불과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는 그는 언제나 무일푼이다. 왜 그런 것일까?

관광버스에서 그의 연인이 관광객들과 노래할 때 그녀에게 다가가 고통스럽게 말한다. “난 왜 하나도 가질 수 없냐?” 그렇다. 그에게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다. 돈 많은 부모도 없고, 부탁할 수 있는 형제나 친구도 없으며, 함께 고민할 아내도 없다. 심지어 편히 쉴 수 있는 집도 없고,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도 없다.

죽으란 법도 없고 죽을 수도 없지만 이렇게 살 수도 없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은 간악해진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무산일기>의 승철이 변한 것처럼, <산다>의 정철도 변하기 시작한다. 겨울철 돈벌이를 위해 메주 공장 사장에게 건의한다. 자신과 친구들이 훨씬 빠른 속도로 일할 것이니 기존 일꾼들을 모두 해고하라는 것. 그렇게 친구들과 메주를 만들며 따뜻한 겨울을 날 것 같은 희망은 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세상은, 언제나 그런 것처럼 정철의 편이 아니다. 그에게 고난은 일상사인 것.

   

▲ 박정범 감독 영화 <산다> 스틸컷

 

 

박정범의 영화에서 놀라운 것은 자본가를 탓하거나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자본의 거대한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자본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산다>에 등장하는 자본가인 메주 공장 사장은 겨우 예닐곱의 노동자를 거느린 사장이고, 자신의 욕심이 부른 실패를 자책하며 자인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회사가 망하면 겨울에 마을 사람들이 굶어야 하는 현실을 함께 고민한다. 노동을 착취하고 인간을 부품으로 생각하는 그런 자본가는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박정범의 영화는 언제나 밑바닥 인생의 고통을 담는다. 그것만이 영화 속에 그려진다. 그것도 무척이나 긴 롱테이크로, 영화 음악을 최대한 배제한 채 리얼리즘의 정수처럼 현실을 직시하듯이 담아낼 뿐이다. 그의 영화가 극명하게 고통스러운 것은 여기에 기인한다. 출구 없는 전쟁.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 명확한 적도 없고, 연대할 동지도 없다. 오히려 노동자끼리 속이며 물어뜯는 세상. 재벌을 비판할 수도 없고 아예 그렇게 하려고도 않은 사람들의 아귀 다툼 같은 세상. 박정범의 영화가 소중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을 다루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 박정범 감독 영화 <산다> 스틸컷

 

 

누나를 찾으러 간 서울에서 친구는 정철에게 말한다. 누나가 지금 많이 아프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너도 아프잖아” 라고. 나는 이 말을 우리 사회가 아프다고 하는 것으로 들었다. 정신이 정상적이지 않은 친구가 오히려 정철을 위로하고 진단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비정상적이다. 우리 사회가 아픔을 숨기고 있듯이(그래서 발설하지 않거나 못하도록 하듯이), 정철은 아프지만 아프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여유가 그에게는 없기 때문에. 결국 누나를 포기하고 그는 조카와 정선으로 돌아온다. 이제 차마저 팔아버려 그에게는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박정범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무산일기>의 승철은 서울에서, 아니 남한에서 살아남기 위해 순수를 버리고 생존 법칙에 적응하려 안간힘을 썼다. 떠날 수도, 살 수도 없는 서울에서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이제 그 승철은 정철이 되어 강원도 정선의 오지에서 여전히 악전고투한다. 동료들은 그를 배신하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와 (미래세대인 어린) 조카와 함께 가로등을 켜고 자신의 미래가 등불처럼 밝아지기를 고대하며 누나를 기다린다. 돈을 받으려고 자신이 떼어냈던 친구 집의 현관문을 직접 달아주고 그 집 아들을 위로하기도 한다.   

   

▲ 박정범 감독 영화 <산다> 스틸컷

 

 

<산다>를 <무산일기>의 되풀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연작이라고 해야 하나? 여전히 (박정범이 연기한) 최하층의 노동자가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희망도 없고 고통만 더해가는 우리 사회에 대한 고발이라는 점에서는 되풀이처럼 보이고, 탈북자가 아니라 남한 노동자가 가족과 함께 시골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다른 버전이지만, 여전히 치열한 노동의 생존 현장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연작처럼 보인다. 정철은 오늘도 무너지기 직전의 집에서 떼인 돈을 받으려 발버둥 치며 누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한다는 명제, 그 의미를 <산다>는 진중하게 묻는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