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뉴델리에 간 적이 있다. 북인도를 여행하기 위한 ‘베이스캠프’라 할 빠아르간지에 숙소를 잡고, 무굴제국의 유적인 ‘랄낄라’(붉은성)에 가려고 릭샤를 탔다. 랄낄라엔 사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감탄을 자아낼만한 웅장함을 가진 건축물임엔 분명했지만, 그보단 릭샤에서 보게 된 어떤 거리의 모습이 마음 깊숙한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그곳엔 굳은살이 시커먼 슬리퍼처럼 내려앉은 맨발로 집채만한 수레를 끄는 노인, 검거나 희거나 붉은 소들, 들개들, 여러 빛깔의 신분적 차별을 드러내는 복색들, 릭샤왈라(릭샤 끄는 사람)부터 첨단의 외제차들까지 모든 것들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뒤섞여 있었다.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허공에 질러대는 사람들, 도로 가에 갖가지 고물로 기워 만든 움막에서 나와 햇볕을 쬐며 구걸하는 엄마와 아이들. 일정한 방향성이 없는 역동성, 고대와 17세기와 21세기가 뒤섞인듯한 광경이 한차례 마음속을 휩쓸어 가버린 느낌이었다.

인도 여행을 다녀온 뒤 이 광경을 여러 사람에게 말해봤지만, 그런 감흥은 말로 전달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여행이 주는 감흥은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행기자의 노동은 고된 면이 있다. 그의 독자들은 길고 지난한 통근길에 갇힌 사람들이다. 이들을 위해 여행에서 얻은 감흥을 그 신선함을 유지한 채로 언어로 정제하는 글쟁이들이 여행기자들이다. 

   
▲ 경향신문 21일자 노르웨이 여행기사. 노르웨이 어느 골짜기 마을의 자연과 삶을 필체에까지 담은듯한 출중한 필력과 단단한 구성을 보여준다. 사진출처=경향신문 인터넷.
 

이번 취재는 지난 21일 여러 신문에 게재된 노르웨이 여행기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출발했다. 간혹 여러 신문에 같은 여행지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질 때가 있다. 2012년에도 몇 일 간격으로 서울, 경향신문, 조선, 한국, 문화일보가 몰디브 여행기사들을 쏟아냈는데, 특정기업의 해외취재 협찬에 따른 결과였다. 이런 경우엔 신문지면이 결국 기업의 홍보에 이용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신문이라는 공적 매체의 신뢰성을 떨어트린다.

이번 노르웨이 건도 유사한 면이 있다. 하루에 한겨레, 경향, 한국일보가 노르웨이의 올레순, 몰데 등의 여행기사를 신문의 두 면(한겨레, 경향) 혹은 한 면(한국)을 털어 실었다. 물론 몰디브 건처럼 기업이 협찬한 것이 아니고 노르웨이 관광청이 외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공식 행사였다고 하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여행기자들의 비용 문제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해외 취재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닌데 외국 정부에서 후원하는 행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자들의 입장에서도 그럴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만약 독자들이 ‘간접체험’만 한다면? 

한날한시에 노르웨이 기사가 쏟아진 이유를 취재하기 전에 먼저 해당기사들을 읽어보았다. 셋 모두 좋은 기사들이었다. 여행자의 감흥을 전달하기 위한 각 기자들의 집중적이고 외로운 두뇌노동이 텍스트 위로 묻어나왔다. 특히 경향신문의 경우는 노르웨이 어느 골짜기 마을의 자연과 삶을 필체에까지 담은듯한 출중한 필력이었다. 이 정도의 기사라면 왕복의 지하터널에 짐짝마냥 실려다니며 스마트폰 너머를 바라보는 독자들에게 감동적인 간접체험을 안겨 줄 만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연출된 체험’의 요소가 너무 강하다. 외국 정부 주관의 행사는 그 나라 관광산업과 연계되며, 관광지들을 취재하는 기자들은 결국 웰메이드 플레이(well-made play, 대중의 취향에 맞게 구성된 연극)를 보고 나오게 된다. 때문에 이런 행사는 여행기사가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한다. 관광산업의 뒤를 따라가는 여행기사가 알려지지 않은 자연, 새로운 삶과 사람, 문화에 대한 체험으로 독자들을 데려갈 수 없는 일이다. 기껏해야 관광지, 풍경, 운치를 소개하는 것 뿐이다. 유력 신문들이 이런 저런 협찬을 받아 값비싼 ‘웰메이드플레이’들을 소개하는 사이, 새로운 여행지를 발굴하고 그곳의 삶과 사람을 담아내는 여행기사들은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 

두 번째, 이런 기사들의 효과는 ‘간접체험’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국 신문 독자들의 순수한 만족감을 위해 행사를 주관할 관광청은 없을 것이다. 관광산업은 최적의 연출된 체험을 전달해 새로운 소비자들을 끌어들인다. 사실상 ‘광고’이지만, ‘여행 경비’에 불과한 비용으로 독자들이 신뢰하는 ‘기자’를 통해 체험을 전달한다. 그 효과를 지면광고에 비할 수 있을까? 

독자들은 협찬성 기사라는 사실도 모른 채 노르웨이를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담아둘 지도 모른다. 기자들의 필력이 좋을수록, 기사 방식이 ‘인터렉티브 뉴스’처럼 기자의 노동이 많이 들어갈수록 광고효과는 극대화 될 것이다. 그렇기에 노르웨이 관광청이 주관했고 교통과 숙박비용 등을 지불했다는 사실만이라도 넣어야 한다. 독자들은 노르웨이 관광청이 자국의 관광산업을 홍보하기 위해 기자들에게 취재비용을 댔다는 점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그렇지만 이 간단한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는다.

관광산업에서 새로이 각광받고 있는 ‘체험 마케팅’ 기법은 관광객들에게 어떤 체험요소들(예컨대 ‘심미적’ 요소라거나 ‘일탈적’ 요소 등의)을 적절히 배합하여 제공했을 때 관광객의 감흥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그 심리적 타점인 스윗 스팟(sweet spot, 배트로 공을 칠 때 가장 멀리 날아가는 지점)을 연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어떻게 체험요소를 배합해야, 스윗 스팟을 맞은 관광객들이 다른 잠재적 소비자들에게 자신의 감흥을 잘 전달할 것인지도 체험 마케팅에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결국 기자는 연출된 체험을 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피실험자가 된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여행기사는 테마파크 답사 기사와도 다르겠지만, 진짜 여행 기사와도 거리가 있다. 과연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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