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둘러싼 여권 내부 갈등이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버티기에 돌입하면서 친박 계가 그를 물러나게 할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는, 곤란한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곤란한 처지에 처한 이들이 또 있다. 바로 야당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유승민 찍어내기’로 이어진 거부권 정국은 사실 야당에서 촉발됐다. 지난 5월 여야가 공무원연금법 개정안 합의를 벌이는 도중에 새정치민주연합은 국회법 개정안을 요구했고, 새누리당이 이를 수용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유승민 원내대표를 콕 집어 비난하면서 여권 내 갈등으로 국면이 전환됐다.

새정치민주연합 입장에서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여당 원내대표가 야당과의 협상을 깨고 국회법 개정안을 사실상 폐기하기로 했으니 야당 입장에서는 원칙적으로 책임론을 거론하며 사퇴까지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과 청와대가 여당 원내대표를 거꾸러뜨리려는 상황이라 야당이 유 원내대표를 압박하는 경우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에 힘을 실어주는 격이 된다. 

그래서 새정치연합은 유 원내대표를 압박하기보다 재의에 부치라며 정의화 국회의장을 압박했고 정의화 의장은 본회의에 재의안을 상정하기로 했다. 강선아 새정치연합 부대변인은 27일 논평에서 “유승민 원내대표가 무릎이 바닥에 닳도록 애절하게 대통령을 향해 사죄를 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절망을 느낀다. 집권 여당의 당 대표, 원대대표까지도 대통령 앞에서는 힘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며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정의화 국회의장이 입법부 수장으로서 중심을 잡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종걸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는 지난 30일 기자들과 가진 오찬 자리에서 “합의한대로 안 된다고 유승민 원내대표를 푸쉬할 만큼 몰염치하지 않아서 그렇게 요청하지 않았다. 다만 소신 있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 하도록 요구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29일 오후 국회에서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와 함께 의사일정 관련 정의화 국회의장 면담을 마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오히려 몇몇 야당 의원들은 유 원내대표를 동정하며 방어하고 있다. 정청래 의원은 SNS에 올린 ‘유승민은 무죄다’에서 “박근혜 의원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안 정면 반기로 MB와 대치했다”며 “박 대통령의 유승민 찍어내기는 지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면부정이다. 박근혜는 무죄이고 유승민은 유죄인가”라고 반문했다.

홍의락 의원은 SNS를 통해 “유승민은 분명하고 냉정하다. 그래서 호감이 가는 인물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 야당에서도 협상 파트너로 (그를) 선호한다”며 “그가 지금 사퇴하지 않는 게 새누리당에 얼마나 득이 되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 없는 듯하다. 지금 사퇴하면 야당에 큰 도움이 될 텐데…”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놓고 유 원내대표를 편들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야당이 유 원내대표를 방어하는 모양새가 될 경우 자칫 대통령의 ‘여당 원내대표 찍어내기’라는 본질이 사라지고 대통령과 야당 간 정쟁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 지지층이 결집하면서 조기 레임덕 위기에 처한 박 대통령이 살아날 수 있다. 

실제 메르스 정국으로 20%대까지 하락했던 박 대통령 지지율이 거부권 행사 직후 7%p 급상승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다. 늘 ‘정쟁을 하지 말자’고 외치는 대통령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정쟁이 벌어져야 대통령이 살아난다. (관련기사 : <박근혜 대항마? 유승민 대권주자 지지율 ‘껑충’>

세월호 참사 때도 비슷한 모습이 보였다. 특별법을 둘러싼 논란이 여야 간 정쟁이 되면서 특별법 제정은 한참이나 미뤄졌다. 특위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과 여당 측 특위 위원들이 특위가 ‘세금도둑’이라고 비난했고 이후 새정치연합이 반박 논평을 내고, 여당 측 위원들이 다시 반박하면서 정치적인 공방이 이어졌다. 당시 새정치연합의 한 의원은 “(진상규명을) 정쟁으로 만들려는 여당의 작전”이라고 평가했다. 

여권 내 권력투쟁 상황에서는 야당이 가만있는 게 더 좋다는 의견도 있다. 새정치연합 한 관계자는 “야당 입장에선 손해 볼 게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현 권력인 대통령과 미래 권력을 내다봐야 하는 새누리당 지도부 간의 갈등이 제 살 깎아먹기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당 내 계파갈등도 유승민 정국으로 덮였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런 상황은 야당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 여당 내 대립이 장기화되고 이런 상황이 총선‧대선국면까지 이어지면 유승민 등 소위 새누리당 내 ‘개혁보수’ 세력이 현 정부의 대안세력으로 부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친박 세력이 ‘여당 내 야당’ 노릇을 했던 상황과 유사하게 전개될 수도 있다. 보수언론은 친박과 친이의 갈등을 부각시킴으로써 박 대통령의 집권이 ‘정권교체’라는 인상을 주었다. 야당이 유승민 거취 문제를 두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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