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탤지어 현상이든 키덜트(키드+어덜트) 현상이든 현재가 어려워서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건 일종의 공식이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에 대한 열광도 그렇다. 그가 나오자 시청자들은 시절을 떠올렸고, 지난 세월이 필름처럼 스르륵 지나갔다고들 한다. 어떤 사람은 코끝이 시큰했고, 또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특히 이 한 마디가 모두를 무장해제시킨 듯하다. “여러분 이제 다 컸구나. 어른이 됐네.” 어른이 되고 싶어 어른이 된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부쩍 커버렸다.

왜 하필 김영만일까. 사람들은 그의 종이접기와 말걸기를 보고 들으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인다고들 한다. 그것은 상념일 수도 묘한 행복감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 감정은 좋았던 시절에 대한 단순한 회상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면 과거를 끄집어내 기억의 퍼즐을 맞춘다는 것은 자신의 개인사적인 기원을 확인하게 하고, 그렇게 자기-서사의 완성을 도움으로써 현재의 불완전한 주체의식으로부터도 벗어나게끔 하기 때문이다. 마치 가끔씩 가족 앨범을 꺼내 무언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 마이 리틀 텔레비전. ⓒ MBC 홈페이지
 

그런 점에서 김영만을 향해 구축되는 스타덤은 근본적으로 새로울 게 없다. 노년층에게 <국제시장>, 중년층에게 <써니>, 그리고 30~40대에게 <건축학개론>이 있는 것처럼 익숙한 패턴의 반복일 뿐이다. 노스탤지어의 주체가 청년층으로 점점 연소화되고 있다는 것을 빼면 새롭다고 할 만한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스탤지어와 키덜트의 복합물로서 김영만 현상은 지속될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당분간은 지금의 20~30대들의 삶이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현상은 생각보다 오래 갈 수 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그들은 시간을 정지시키고 붙잡아두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종이접기라는 콘텐츠 성격을 감안하면 길지 않은 시일 내에 싫증을 낼 수도 있다. 결국, 청년들의 노스탤지어라는 기이한 형용모순은 그 외피를 달리 하면서 자기 명줄을 이어가는 형세가 될 공산이 크다.

   
▲ 마이 리틀 텔레비전. ⓒ MBC 홈페이지
 

하지만 나로서도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가만 보면 가족 앨범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다. 노스탤지어 현상의 함정은 이것이 역사와 기억을 언제나 매끄러운 것으로 포장해준다는 데 있다. 그런데 공교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경제적 풍요든 정치적 공존이든 어떤 성취감도 맛보기 어려운 시대이고, 이런 시대를 살면서 스스로 성장판을 닫아놓은 사람들에게 리얼리티로 돌아가라고 강요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기도 저러기도 힘든 현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현실에 리셋버튼이 없다는 건 참으로 비극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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