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보건학회가 삼성 백혈병 조정권고안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내놨다. 사회적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그간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산재 입증이 어려운 질병의 치료와 보상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평가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번 기회에 산재보상보험 제도의 개편 또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산업보건학회는 지난 29일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 조정권고안'(조정안)에 대해 삼성전자와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가족대책위에게 “큰 틀에서 조장안에 대해 동의가 된다면 조금씩 양보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주기를 간곡히 요청한다”고 밝혔다. 

학회는 판단 근거에 대해 “삼성 백혈병 논란에서 보듯 근로자에게 발병하는 질환은 현재의 자료와 과학적 방법으로는 직업관련성 및 업무연관성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암이나 희귀질환 등은 잠복기가 길거나 낮은 농도에서 양-반응관계가 뚜렷하지 않고, 질병 발생도 확률론적으로 나타나기 어려워 기존 방식으로는 (입증하기가) 더욱 어렵다”고 밝혔다.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지난 2013년 3월 서울 곳곳에서 전자산업 피해자 추모주간 행사를 하고 있다. 사진=반올림 제공
 

실제 ‘입증책임’은 산재인정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현행법은 산재를 주장하는 쪽이 업무상 재해발생의 인과관계를 증명하도록 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이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전자산업은 공정이 복잡하며, 취급하는 화학물질의 수가 많고, 여러 화학물질이 복합적으로 사용된다. 또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물질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며 회사가 영업비밀이라며 공개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산업보건학회도 언급했듯이 희귀질환인 경우에는 더 심각하다. 가령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루게릭병에 걸린 이윤성씨에 대해 법원은 “루게릭병은 현대의학상 아직 그 발병원인이 밝혀지지 아니했다”며 “(이씨가 다루었다고 주장한) 화학물질과 이 사건 질병(루게릭병)과의 관계에 관해서는 실험연구 및 역학연구가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반올림은 “현대의학에서 밝히지 못한 발병원인의 책임을 왜 노동자에게 전가하나. 그 책임은 정부와 사회가 져야한다”며 “따라서 희귀질환일 경우, 개인질병이라고 정확히 입증되지 않는다면 직업병으로 봐야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이번에 발표된 조정안에는 이같은 지적을 받아들여 5종류의 희귀암과 11개 종류의 희귀질환을 3군 질병에 포함시켜서 피해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게 했다. 

산업보건학회는 삼성전자와 반올림, 가족대책위 세 주체가 조정위에게 조정안을 맡긴 것을 두고 “사회적 합의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간 것은, 산업보건의 문제 중에서도 특히 보상과 관련된 문제를 베타적 논쟁에서 벗어나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살 만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산업보건학회는 “더 이상 과거 전통적인 제조업 중심의 직업병 모델에 기반한 산재보상제도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며 이번 기회에 산재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할 것 역시 제안했다. 이번에는 삼성이라는 특수성과 반올림 등 오랫동안 싸워온 주체가 있었기에 사회적 합의가 가능했지만, 개별 노동자들이 모두 이번처럼 기업과 협상을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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