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보면 딱 정신병자라고 생각할 일이었다. 그 남자가 어딜 가든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묵직한 박스에는 1990년대 모뎀과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 한 손으로 작동하는 키보드와 마우스 따위가 주렁주렁 연결되어 있었고, 왼쪽 눈 앞에는 작은 컴퓨터 스크린이 달려있었다. 게다가 그 모든 장비들에 전원을 공급하는 배터리는 황산이 들어있는 무거운 납 축전지였다.

그 남자는 그 장비를 몸에 지니고 무려 21년을 살았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조금씩 가벼워지기는 했지만 잠 잘 때와 샤워할 때, 그리고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을 제외하고는 그런 장비를 몸에서 벗은 적이 없다. 21일도 아니고 21년을 그렇게 하고 사는 것은 맨 정신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태드 스타너(Thad Starner). 문명의 이기를 보기 힘들던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러다가 12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하고 빠져들기 시작했다. 스타너가 고등학생 때 하루는 아버지께 수학 문제 푸는 걸 도와달라고 가져갔다. 아버지는 “예전에는 알던 문제인데,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잊어버렸다”고 했다.

   
▲ Thad Starner. CCL Attribution 2.0 Generic.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그 말이 스타너에게는 집착에 가까운 질문이 되었다. ‘왜 사람은 기억을 잃는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이 어느 날 저렇게 사라진다면 그런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질문을 안고 살던 그는 MIT를 다니던 시절,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힌트를 얻었다. ‘눈 앞에 정보를 보여주는 헤드업 디스플레이(HUD)를 달고 컴퓨터를 들고 다니자. 모든 것을 현장에서 기록하고, 기록한 것을 어디서나 눈 앞에서 볼 수 있게 하자.’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4kg짜리 리지(Lizzy)였다. 그 날 이후 그의 몸에서는 컴퓨터가 떠난 적이 없다.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꼴을 하고 돌아다니던 그는 훗날 구글글래스(Google Glass)개발의 주역이 된다.

그가 구글글래스 개발을 이끌게 된 건 당연한 일이다. 몸에 입는(wearable)컴퓨터를 개발하려는 회사가 가장 궁금해하는 건 ‘컴퓨터를 몸에 걸치고 생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게 불편한지’이다. 그런데, 여기 그런 걸 자발적으로 10여년 째 해온 컴퓨터 엔지니어가 있다. 그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과학과 공학은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통해서 진전한다. 열 가지 가능성 중에서 성공적인 하나를 찾아내려면 나머지 아홉 개가 틀린 길이라는 데이터를 누군가 가져와야 한다. 스타너는 그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도 시도해본 적 없는 일을 하려는 기업에게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최고의 인재다. 하지만 모든 인재를 수요에 맞춰 효율적으로만 기르는 우리에게는 그런 사람들이 부족하다.

국내의 한 유명 전자회사가 웨어러블을 처음 내놓았을 때 제작에 참여한 어느 디자이너의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일단 내놓기는 했는데, 구글이 어떻게 만드나 보고 거기에 맞춰서 다음 버전 준비해야죠."

   
▲ 태드 스타너가 만든 초창기 웨어러블 컴퓨터 리지2.
 

한국의 전자산업이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를 벗어나 새로운 영역의 개척을 주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 시점에, 정부는 2018년부터 초중등학교에서 소프트웨어 교육을 필수로 하기로 했다. 물론 그 자체로는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좋은 의도의 소프트웨어 교육도 한국 교육계에 도입되면 점수를 따야 하는 또 하나의 부담으로 전락하고 만다. 벌써 코딩능력을 평가하는 자격시험이 등장하고, 그걸 특목고나 대학 수시입학용으로 사용하려는 부모들의 요구에 맞춰 학원가도 들썩인다는 보도도 나온다.

지금 이 땅에는 어린 태드 스타너처럼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 아이들은 패스트 팔로워가 아니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니 남들보다 느리게 움직인다. 하지만 한국을 패스트 팔로워 수준에서 벗어나게 해줄 열쇠, 한국이 비로소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게 해줄 비밀은 바로 그 아이들이 가지고 있다.

정부가 하루 아침에 방향을 정하고 “저기가 고지”라고 외치면 온 국민이 일제히 전력질주하고, 아이들은 왜 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그냥 죽자고 정답만 외우는 한국 사회에서 그런 아이들은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기는커녕 느리다고 야단을 맞으며 자신을 잃고 같이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은 다른 나라 차세대 태드 스타너들의 주문에 따라 숙련된 솜씨로 빠르게 코딩을 해줄 것이다. 뛰어서는 안 될 아이들에게 전력질주를 강요하면서 패스트 팔로워를 탈출하자고 외치는 건 어리석다 못해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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