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은 ‘조선의 밤 문화’에 도저히 만족을 못했는지 일본 규슈의 벳푸나 교토까지도 원정을 다녔다. 이 희대의 밤 문화 탐닉 행각은 장장 5년 동안 이어진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기 직전까지 … (중략) … 후에 그는 “암담한 정세 속에서 찾아드는 말할 수 없는 허전한 심정이 밤마다 발길을 주석으로 돌리게 했을 뿐이다”라고 회고했는데, 암담한 정세 속에서 광복의 희망을 찾아 피 흘리고 싸운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들으면 코웃음도 아까운 방탕이었다”

지난해 가을부터 색다른 경제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는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가 ‘한국재벌 흑역사(상)’를 내놨다.(민중의소리. 368쪽. 15000원) 책 전체가 맛깔스럽고 신랄하다.   

1997년 동아일보 입사 후 사회부와 경제부 기자로 활동했던 이완배 기자는 2007년부터 네이버에서 자칭 ‘타이핑노동자’(금융서비스 팀장) 일을 하다가 민중의소리에서 다시 기자생활을 재개했다. 그는 “누구 말마따나 40대 중반에 ‘전향’해서, <민중의소리>라는 진보 매체에 몸을 담”았다고 했다.  

사실 재벌을 기록한 책들은 너무도 많지만, 이완배의 재벌사가 그의 기사들만큼이나 특별한 이유는 그 ‘공정함’에 있다. 재벌가와 관련한 자서전나 회고록, 아니면 전기나 평전들은 자세하긴 하나 재벌가의 의도적인 과장 또는 매문(賣文)에 의한 턱없는 칭송이 태반이고, 재벌가에 대한 연구서들은 그야말로 ‘연구’를 위한 책이므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라 하기엔 앙상한 것이 사실이다.  
 
이완배는 “그들의 공에 대한 역사는 너무도 상세히(혹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된 채) 기록된 반면, 그들의 과에 대한 역사는 너무도 부실하게 남아 있다”는 점을 집필의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이완배 기자가 강자의 횡포를 기록하는 ‘현대의 사관’을 조심스레 자처하는 것도 재벌이 저지른 해악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운 사정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재벌 흑역사>는 독보적인 책이라 할 만하다. 

   
▲ ‘한국재벌 흑역사(상)’ 표지 앞면.
 

삼성과 현대를 소상히 다루고 있는 상편엔 △삼성의 용인자연농원의 편법 증여 의혹 △현대 재벌을 위한 박정희의 사채동결조치의 배경 △이른바 ‘현대조선 폭동’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등 그동안엔 찾아볼 수 없었고, 향후 재조명되어야 하는 많은 사건들이 여럿 포함돼 있다. 

동아일보에 몸담았던 이완배 기자는 서문에서 “1970년대 후반 삼성 재벌에 관한 정교한 비판의 목소리가 당시 <동아일보>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는 사실”에 다행스러워하면서 그 이유를 “삼성의 계열사인 중앙일보가 석간신문 시장에서 동아일보와 최대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곧 ‘석간 전쟁’ 덕에 1970년대 삼성에 대한 충실한 기록을 볼 수 있고, 역사의 기록이란 이런 식으로 조금이나마 공정하게 만들어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기레기와 저널리스트, ‘기사 자판기’와 사관(史官)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언론노동자로서, 기자 이완배의 고투가 만들어낸 이 책을 읽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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