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상파 방송사 구성작가협의회의 구인구직란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2~3년차 자료조사 담당을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프로그램 담당 작가와 함께 자료를 조사하는 것이 업무의 내용이었다. 근무형태는 내년 1월까지로 상근직이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구인글에 해당한다. 구인글 끝에 덧붙여진 문장 하나가 없다면 말이다. 

“페이는 매주 상품권으로 지급됩니다.”

미디어오늘이 만난 방송작가들은 방송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전문적인 방송작가를 꿈꾸며 300만원에 달하는 방송사 사설 아카데미의 과정을 이수한 이들도 많았다. 애정어린 방송일인 만큼 자신이 만든 방송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방송작가의 방송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프로그램 제작에 필요한 한 요소에 불과하다. 근로기준법 상의 최저임금인 116만원과 주당 40시간의 근무시간은 방송계의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의미를 잃었다. 급여는 방송작가들마다 제각각이며 휴가는 쓰는 순간 방송 제작팀에서 하차해야 하는 처지다. 상품권으로 모든 임금을 지급받는 일부 이상한 관행조차도 방송작가들이 방송제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돌아온다. 

방송작가들은 파견과 직접 고용과 계약직 등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적 고용의 경계를 넘나든다. 방송작가는 기본적으로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계약서 없이 구두로만 고용된다. 파견회사를 통해 방송작가의 길로 들어갔다는 한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방송작가는 “파견업체를 통해 2년간 계약을 맺고 방송작가를 시작했다. 파견인데도 면접은 방송사가 봤고 계약서는 없었다. 파견 기간 2년 끝나면 방송사와 잘 얘기해서 프리랜서로 활동하는데 이 때도 딱히 계약서 없이 그냥 가서 일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파견업체에서 고용하는 방송작가의 경우 같은 막내작가라도 학벌과 경력에 따라 각각 다른 급여로 시작한다. 가장 낮은 ‘라급’의 경우 전문대 졸업에 경력이 없는 이들이 이에 해당하며 월급은 90~100만원이다. ‘다급’에 해당하는 이들은 경력은 없고 4년제 졸업자인 이들로 120만원을 받게 된다. 나급부터는 1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이들로 150~160만원 정도의 월급을 보장받는다. 가급은 200만원 이상의 월급을 받는다. 

파견이 아닌 외주제작사나 방송사 프로그램 제작팀과 직접 고용 ‘계약’을 맺고 일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도 일관된 고용형태와 조건에 대한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3년차 예능작가는 “계약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급여는 전에 받았던 수준을 물어보고 이에 맞춰 준다. 4대보험도 근로시간 약속도 따로 없었다. 쉬는 날도 보장돼있지 않다. 특히 막내들의 경우 주말에는 언제든 재택근무를 하면서도 비상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프리랜서의 세계에서는 인맥도 또 하나의 취업 경로로 작용한다.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건네는 것이 가끔 다른 작가인 경우도 있다. ‘메인작가언니’나 PD가 프로그램을 소개해주거나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방송사의 사설 아카데미 과정이 비싸더라도 이 과정을 거쳐 인맥을 쌓으려 하는 이들도 있다. 인맥을 갖추고 있다면 근로환경이 비교적 열악한 외주제작사의 프로그램 대신 조금 더 여건이 좋은 방송사 본사제작 프로그램이나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방송작가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얻게 된다. 

   
▲ ⓒiStock. 편집=이우림 기자

기본적인 근로조건도 ‘그림의 떡’
구두로 얘기한 근로조건 조차 수시로 뒤바뀐다. 막내작가의 월급은 대체로 최소 80만원에서 많게는 120만원 이상도 받는다. 이들의 월급은 ‘관행적’으로 후려치기 된다. 특히 방송사에 프로그램을 제작해 납품한 후 제작비를 받아야 하는 입장인 외주제작사 소속 방송작가들의 상황은 더욱 위태롭다. 

교양 프로그램의 한 3년차 서브작가는 “한 외주제작사의 경우 월급으로 120만원을 준다고 했는데 갑자기 기준이 바뀌었다거나 얼마 일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며 처음에 말한 것보다 적은 금액을 주는 경우가 있었다. 다큐프로그램 하나만 만드는 조건으로 월급 140만원을 준다던 한 외주제작사에서는 출근한지 이틀만에 다른 프로그램까지 만들라는 업무지시도 내려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한 지상파 방송사의 유명한 예능 프로그램에는 메인작가와 서브작가, 막내작가로 이어지는 서열 아래 인턴이라는 직책이 하나 더 있다. 막내작가보다도 더 밑바닥 잡무를 담당하는 존재인 셈이다. 친구 한 명이 그 프로그램의 인턴으로 들어갔는데 급여를 80만원 어치 상품권으로 받았다고 했다. 프로그램 협찬을 받고 남은 부분을 급여로 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급여 이외의 다른 복지는 꿈도 못 꾼다. 퇴직금은 기대할 수 없다. 식비와 교통비, 시간외 수당 등 업무와 관련된 비용 역시 모두 방송작가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방송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밤새 업무를 해도 이에 대한 수당은 지급되지 않는다. 

근무 기간이 명시된 계약서가 없으므로 잘리는 일도 쉽다.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당 프로그램의 작가가 모두 교체되기도 한다. PD나 제작팀 관계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작가 교체를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방송 근로계약을 맺지 않지만 사실 실질적인 방송 제작 과정에서는 메인작가나 PD, 제작팀장 등의 지휘나 감독 하에 놓인다. 따라서 이들은 근로기준법 상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러한 문제는 ‘열정노동’이라는 방송계 관행이라는 명목으로 힘을 잃는다. 

막내작가가 받는 100만원 정도의 월급은 10여년 전과 지금이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이 업계의 전언이다. 쉽게 데려다쓰고 버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굳이 월급을 올려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까닭이다. 한 방송작가는 “방송작가는 싸게 쓰려고 프리랜서 형태를 유지하는 것 아닌가 싶다. 경력많고 연차 높은 전문성 갖춘 작가보다 어린 막내작가를 주로 데려다 쓰려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방송사-독립제작사 갑을관계, 방송작가는 ‘병’
특히 외주제작사의 열악한 제작 환경은 방송작가에게도 큰 타격으로 돌아온다. 외주제작사가 방송사에 납품할 프로그램을 다 만든 후에도 방송사가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 갑자기 편성 상의 이유로 제작 중단을 선언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경우 투입된 제작비 중 일부만 보전받거나 아예 보전받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방송사들이 이미 제작된 프로그램에 대해 방송 불가 판정을 내리는 이유는 다양하다. 처음에 프로그램 납품 계약을 맺었을 때만큼 기대했던 프로그램의 질이 확보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납품 거부의 기준이 모호한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교양프로그램의 3년차 방송작가 A씨는 “한 종편 프로그램에서 난민 아이들 관련 영상을 제작한 적이 있는데 ‘인터뷰 대상자 중에 너무 흑인이 많다’며 이 시간에 누가 그런 방송을 보겠냐는 이상한 논리를 들면서 방송 불가 판정을 내렸다”고 전했다.

시청률에 따라 신규 편성과 폐지가 더욱 유동적인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방송작가들이 급여를 보전 받지 못하는 일은 더욱 자주 발생한다. 다만 인기 예능 프로그램은 시사교양 프로그램보다 조금 더 많은 제작비와 협찬이 들어오는 특성이 있어 급여 수준이 높게 책정되는 경우도 있다. 

제작사에 돌아오는 제작비가 줄어들면 그 제작비의 일부로 고용된 프리랜서인 방송작가들의 몫도 크게 줄어든다. 방송이 불방되면 제작비 보전도 어렵다. 이미 만든 방송에 대해서도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방송작가들에게 매우 흔한 일이다. 그나마 100만원 남짓 받는 월급조차 방송 불방으로 50만원에 못 미치는 수준으로 크게 깎이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다. 방송사가 갑이라면 외주제작사는을, 이에 속한 방송작가는 병인 셈이다. 

물론 상습적으로 핑계를 대며 방송작가의 급여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악덕’ 외주제작사도 존재한다. 이러한 외주제작사의 경우 방송작가들 사이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다. 

방송사 본사에서 일하는 방송작가의 상황은 조금 나은 편이다. 그나마 ‘읍소’를 통해 제작비 일부에서 급여를 보전해달라고 요구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작비가 본사에서 직접 나오고 이를 결정할 수 있는 제작팀장도 있고, 팀장과 직접 소통하는 메인작가언니가 있기도 하다. 

한 지상파 방송사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7년 간 일한 한 서브작가는 “마음 좋으신 팀장을 만나면 급여를 보전받는 일도 가능하다. 프로그램이 불방돼서 급여를 받지 못하는 방송작가들이 생기면 프로그램에 배당된 제작비를 일부 돌려서 급여를 대신하는 좋은 분들도 있다. 어차피 PD나 팀장은 정직원이라 불방돼도 월급은 나온다. 그 조차 기대하기 어렵다면 급여가 없는대로 살아야 한다”고 답했다.

   

열정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는 불합리
방송이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밤새 방송을 만든 후에 급여를 보전받지 못해도, 이들은 방송작가로서의 일이 만족스럽다고 입을 모은다. 

“저는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이 일을 선택했어요. 10개월 남짓 일했는데 방송일이 재밌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요. 제가 관심있는 사회 주제에 대해 직접 취재하고 이게 방송으로 제작돼 시청자들로부터 반응이 오면 보람이 굉장히 크거든요. 다만 그러한 방송작가들의 열정을 이용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해준다는 이유로 기본 근로조건 중 어떤 것도 갖춰지지 않은 모든 불합리한 상황을 강요하지는 말라는 것이죠.”

한 10개월 차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방송작가는 불합리한 환경 속에서도 업무 자체에는 만족스러워했다. 방송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열정에만 기댄 노동은 한계를 내비칠 수 밖에 없다. 

3개월 만에 방송작가를 그만두고 현재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B씨(27세)는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이런저런 불이익이 있더라도 모두 감수하라는 것이 당연한 사회였다. 아쉽더라도 열심히 참고 메인작가가 되라는 말이 전부”라고 말했다. 또 다른 방송작가 C씨(32세)는 “방송작가는 방송장비로 취급되는 것 같다. 장비니까 쉽게 갈아끼울 수 있다는 논리”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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