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상 영화제가 수상자들의 불참으로 엉망이 된 상황에서 청룡영화제는 극찬의 대상이었고 호평일색이었다. 정말 그럴지 여전히 의문이었다. 일단 청룡영화제는 애초에 대종상영화제처럼 ‘참가상’을 운운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영화배우들이 대거 불참하는 일은 없었고, 다만, 일부 배우들만 피치못해 참석하지 못했다. 더구나 특히, 여우주연상에는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열연했던 이정현이 선택되었다. 2014년 영화 ‘한공주’의 배우 천우희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우연이라고 보여지지 않았다. 이는 상징적인 장면이자 실체적인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듯 했다. 더욱 청룡영화제가 의식있는 영화시상식으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작품속 여배우들의 여우주연상 수상이 독립영화나 다양성 영화에 대한 배려를 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에 경계의 눈초리가 있기도 했다. 노동자와 장애인의 비극적인 삶을 희비극으로 다룬 이 영화를 과연 청룡영화제가 수상작으로 뽑아줄 것이냐 하는 점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국사회의 물신주의를 꼬집고 있기도 하다. 결과는 이정현의 수상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후보는 작품상이나 감독상이 아니라 여우주연상에 머물렀다. 거꾸로 이 작품이 작품상이나 감독상을 받을 리는 만무했다. 우리는 스스로 이미 한계 지우고 있었고, 이는 대종상과 견주어 볼 때만 상대적으로 낫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비단 올해만의 일이 아니라 흔히 대종상 영화제는 상업 영화 위주로 이른바 몰아주기를 한다는 점이 부각되어 왔다. 몇해전 영화 ‘광해-왕의 남자’의 경우 무려 15개 부문에 걸쳐 휩쓸었다. 올해에도 싹쓸이 수상이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은 10개부문에 걸쳐 각 부문의 상을 쓸어 담았다. 청룡영화상은 ‘사도’, ‘암살’, ‘국제시장’ 등이 3-4개 상을 나누어 가졌다. 대종상 영화제처럼 여러 상을 한 작품이 휩쓸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상업영화들이 중심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상을 골고루 나누어 준데다가 가치있는 배우도 선택한 듯 싶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 출연한 이정현은 ‘꽃잎’ 그리고 ‘명량’을 거쳐 여우주연상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댄스 가수라는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셈이 되었다. 노개런티로 출연하며 많은 분량의 대사와 연기를 소화한 보람이 있게 되었다. 신인상을 수상한 ‘거인’의 최우식의 경우에도 이런 청룡영화제의 정체성을 뒷받침하는 듯 싶었다. 물론 신인상에 독립영화나 다양성 영화의 배우가 수상하는 예는 종종 있어온 일이었다.

   
▲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포스터
 

그렇다고 해서 대종상 영화제나 청룡영화제가 본질적으로 다른 지 잘 모를 일이다. 예컨대, 정말 여성들의 노동현실을 다룬 작품을 생각했다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 주목하기 보다는 ‘위로공단’을 주목해야 했을 것이다. 올해에도 장애인을 다룬 작품들도 많다. 그러나 주목적이 그게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결국 ‘성실한 나라 앨리스’의 이정현을 선택한 것은 차별화를 통해서 대중적 흥행을 꾀한 것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는 이정현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이정현의 비중은 노개런티 대신에 거의 원맨쇼에 가까웠다. 이정현의 연기상 수상은 어느 정도 예측된 일이었다. 하지만, 성실하게 산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하고 삶 자체가 파탄나는 모순을 담아 내고 있는데, 작품관련이 아니라 여우주연상에 그치고 있다. 하긴 작품 자체에 대한 상은 적기만 하다. 관점이 획일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도 대종상이나 청룡상이나 같아보인다.

다음으로 시스템을 보자. 대종상 영화제는 민간으로 정확하게는 대기업에 운영주체가 넘어가면서 사단이 나기 시작했다. 관련 기업 회장의 구속으로 협찬기업이 떨어져 나가면서 어려워졌다. 다른 말로 하면 재정이 불안정해졌다. 이러한 면은 더욱 수익 사업이나 상업적인 측면을 중시하게 된 원인이었다. 횡령사건이 일어난 것은 대종상을 운영하는 주최들의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난 일이었다. 여기에 오랜동안 영화계를 쥐락펴락한 인사들의 이해관계와 기득권을 여전히 뒷받침하는데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이 이용되었다. 이 때문에 다양한 영화에 대한 판단기준은 없고, 대형흥행영화가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상황이 더 심화되었다. 물론 영화의 유형은 획일적이고 고정적이었다.  

청룡영화제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안정적인 재정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그 운영 주최가 단일하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난입하거나 복마전처럼 얽혀 있지 않기 때문에 횡령이나 구속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애써 한 작품에 몰아줄 필요가 없다. 애초에 특정 영화 세력이나 조직을 대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좀 더 개방적이고 유연한 심사과정이나 사후 소통과정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후보작들을 선정하는 것은 나름의 사전 선택에 따르며, 최종 선정은 그 틀안에서 각 주체들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청룡영화상도 여전히 기존의 틀안에서 머물기는 마찬가지다. 그럴 필요가 없다. 정말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여우주연상으로 선을 분명하게 긋고 있을 뿐이다. 상대적인 구별짓기가 중요하다. 아무리 대종상이 엉망이라고 해도 상대적인 비교우위 때문에 그 내적인 모순을 모두 합리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나아보일 뿐이며, 청룡영화제를 극찬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어쩌라는 말인가. 영화 시상식은 다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심사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정체성과 영화적 관점을 묻는 것이다.

2013년 ‘감사자들’의 한효주는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만약 독립영화나 다양성 영화의 배려 차원에서 천우희, 이정현처럼 인위적으로 연기상을 특정 영화적 장르에 주는 것도 객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배려라는 것은 결국 청룡영화제의 정체성과 배치되는 것을 말한다. 배려가 아니라 영화제 자체가 그것을 선호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여우주연상이 아니라 작품상이 주어져야 한다. 연기상도 마찬가지다. 진짜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화제성을 갖고 있어야 연기상이 주어진다. 이때문에 뜻하지 않게 시상이 이루어지고, 배우들은 이에 휘둘려 버린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악령이 든 여고생, 영화 ‘사도’에서 회초리를 맞는 후궁, 영화 ‘베테랑’에서 클럽룸에 있던 여성은 모두 박소담이 맡았던 캐릭터였다. 한국영화계에서 여배우가 흔히 걸었던 스타 시스템과는 다른 면에서 박소담은 차근차근 자신의 캐릭터와 연기역량을 다져 오고 있다. 그동안 여성 배우들은 상업영화의 논리에 따라 스타만들기를 통해 소진되어 왔다. 시상식은 이러한 거품만들기에 기여해 왔다. 배우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는 시상식이 되어야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 시상식은 단번에 스타를 만들어 그러한 토대와 역량 축적을 방해해 왔다. 영화 시상식은 영화제작 과정과 결과를 치하하고 분발을 촉진하는 계기지만 많은 경우, 연기자들을 행보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여하튼 대종상 영화제이거나 청룡영화제거나 모두 지상파 방송을 통해 황금시간대에 방송되었다. 미디어의 정체경제학 속에 둘이 여전히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직접적 수익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가, 간접적 수익을 우회적으로 추구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대종상이 못하고 청룡상이 낫다는 평가를 넘어서서 다양한 관점의 영화제가 만들어지고 이에 대한 텔레비전 미디어의 관심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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