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17일
‘돌아온 피겨 여왕’ 김연아는 태극기를 휘감으며 
대한민국의 힘을 전세계에 다시 한 번 떨쳤습니다.
자랑스런 태극기가 가장 높은 곳에 오르고,
캐나다 여성 합창단이 우리말로 애국가를 부를 때,
대한민국 국민은 가슴이 벅찼습니다.
‘3·17 런던 쾌거’
김연아, 당신은 ‘애국 종결자’ 입니다. 
(스포츠조선 3월18일자 1면, <이게 애국이다>)
 
김연아의 ‘귀환’에 찬사 쏟아낸 언론
 
화려한 복귀를 알린 김연아(23) 선수의 ‘성공’ 앞에, 18일자 신문들은 일제히 가장 높은 수준의 찬사를 쏟아냈다. 돌아온 ‘피겨 여왕’이 심판진의 ‘트집’에도 불구하고 ‘클래스가 다른’ 경기를 선보이며 ‘전 세계’에 감동을 선물했다는 내용이다. 

   
▲ 스포츠조선 3월18일자 1면
 

물론 압도적인 경기 결과였다. 김연아 선수는 17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런던의 버드와이저 가든스에서 열린 2013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총 218.31점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2위 카롤리나 코스트너(197.89점, 이탈리아)와는 20점 차이였다. 김연아 선수가 얻은 218.31점은 역대 2번째에 해당하는 높은 점수이기도 했다. ‘김연아 밖에 안 보였다’는 내·외신들의 평가가 과장됐다고 보긴 어렵다. 김연아 선수는 분명 독보적인 경기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늘 그렇듯, 한국 언론들에게 김연아 선수의 우승은 ‘그 이상의 무엇’을 의미했다. 그는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2년 만에 화려하게 귀환”한 “‘피겨여왕’”(한국일보 사설)이자, “작은 시련에도 쉽게 굴하는 청소년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정신”을 일깨워준 “‘피겨 여제’”(세계일보 사설)로 묘사됐으며, 그의 우승은 “온 국민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희망을 새겨주는 낭보”(국민일보 사설)였다.
 
또 한편으로 김연아 선수는 “‘3·17 런던 쾌거’”를 이룬 “‘애국 종결자’”(스포츠조선 1면)였고,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심판진을 눌러버리는 장면은 통쾌하기까지 했다”(일간스포츠 2면). “내년 소치 동계올림픽까지 우승하면 경제적 효과가 6조원에 이를 것”(한국경제 35면)이라는 장밋빛 기대를 불러일으킨 스포츠 스타이기도 했다. “애국가와 태극기, 그리고 김연아가 있었다”(스포츠경향 1면)는 식의 다소 노골적 표현도 지면에 등장했다. 
 
김연아는 이미 단순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가 아니었다. 그는 또 한 번 언론에 의해 ‘국위선양’의 주체로 호명됐다. 김연아 선수가 태극기를 펼쳐 보이고 있는 모습도, 그의 우승으로 우리나라가 내년 소치올림픽에서 3명의 여자 싱글 출전권을 획득한 것도, 한국 언론들에겐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의 한 장면이었다. 일부 언론들은 캐나다 현지 합창단이 애국가를 한국어로 불렀던 사실을 소개하며 “여왕의 복귀를 일찌감치 예견하고 ‘대관식’을 위해 한국어로 애국가를 준비한 것으로 전해졌다”(세계일보 2면)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김연아의 ‘국위선양’?…언론도 넋 놓았나
 
이처럼 언론들은 ‘객관’과 ‘주관’의 경계를 스스로 허물어뜨렸다. 스포츠평론가 최동호씨는 “일종의 상업주의”라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나라 스포츠 저널리즘의 전통 중 가장 잘못된 것 중 하나가 애국주의”라며 “장사가 되니까 언론들이 적절하게 활용하는 코드”라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장에 취재를 안 가고 책상 앞에 앉아서 (다른 기사를) 받아서 쓰는 기사가 너무 많다”며 “똑같이 베껴서 쓸 수는 없으니까 좀 더 자극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일간스포츠 3월18일자 1면
 
 
스포츠에 ‘민족주의’가 끼어들 토양을 만든 것도 바로 언론이었다. 문화평론가 이택광 교수는 “우리도 세계의 벽을 넘을 수 있다는 것, 그 반열에 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선진국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며 “대중이 원하기 때문에 언론이 영합해서 따라가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대중들의 열망에는 “김연아 개인의 성공이라기보다는 한국인이라는 ‘인종’의 특성이 발현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깔려 있다. 일부 언론이 김연아 선수의 연기를 ‘한국의 강’에 묘사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냉정히 따지면, 김연아 선수의 ‘이례적인 성공’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 신체적 조건에 의존한 바가 크다. 김연아 선수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의 전폭적인 지원과 ‘투자’ 덕분에 해외의 유명 코치진들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혹독한 훈련을 견뎌왔다. 유난히 팔 다리가 긴 신체조건은 ‘서양인’과 줄곧 비교되며 중요한 성공 요인으로 꼽혀왔다. 김 선수의 성공에 ‘한국인’이라는 조건이,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의 빙상계가 기여한 부분이 얼마나 될까. 단적으로 3장의 출전권을 따냈지만, 당장 “김연아의 뒤를 이을 선수가 보이지 않는다”(중앙일보 28면)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이다. 
 
한국 스포츠에서는 ‘시스템’을 거쳐 성공한 선수들을 찾기 어렵다. 이는 ‘세계적 스타’가 된 다른 종목 선수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골프의 박세리 선수가 그랬고, 수영의 박태환 선수가 그랬고, 2002년 월드컵에서의 한국 축구대표팀이 그랬다. 이택광 교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성공한 사람들은 항상 외부에서 가져온 시스템에 잘 적응한 ‘개인’에 불과하다”며 “그런 성공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연아 선수도 예외가 아니다.  
 
김연아 선수의 우승에 대한 언론 보도에 우려가 쏟아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최동호 평론가는 “언론이 어떤 선수를 신격화시키고 항상 이길 것처럼 국민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다가도 그 선수가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을 때는 그 기대가 맹목적 비난이나 비판으로 바뀌게 된다”고 우려했다. 이택광 교수는 “시스템에 잘 적응한 ‘자기계발 모델’로 김연아 선수가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며 “언론들이 성찰적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사다 마오는 수준 이하?… ‘국가주의’ 부추기는 언론
 
‘애국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한국 언론들의 집착이 드러나는 대목은 또 있다. 오랜 경쟁자이던 일본의 아사다 마오(23) 선수에 대해 한국 언론들은 혹평을 쏟아냈다. “트리플 악셀에 대한 집착”(YTN)에 매달리다 ‘수난’을 겪은 아사다 마오 선수는 “더 이상 라이벌이라 부르기도 힘들”(스포츠조선 4면) 정도였기 때문에 “이제는 ‘라이벌’이라는 세 글자를 빼야 할 때가 됐다”(경향신문 26면)는 기사가 쏟아졌다. 

   
▲ 경향신문 3월18일자 26면
 

2011년 ISU 피겨 세계선수권 대회 기간 중 한국의 네이버와 일본의 야후제팬에 게재된 관련 보도 894건을 분석한 논문(<한·일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스포츠저널리즘 비교 연구>)에 따르면, 한국 언론들은 “김연아 선수를 매우 뛰어나고 우월적이며 영웅적인 존재로 강조”하면서도 “아사다 마오 선수를 열등한 존재로 비하”하는데 바빴다. “한국과 일본의 국가 간 경쟁 또는 민족 간 경쟁과 대결구도로 과장하고 확대하는 국가주의적 경향”을 노출하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당시 네이버에서 ‘가치중립’적인 프레임의 보도는 6.1%에 그쳤던 반면 야후제팬에서는 42.1%였다. 반대로 ‘승리지상주의’ 프레임의 보도가 네이버에서 30.0%에 달했던 것에 비해, 야후제팬에서는 6.9%에 불과했다. 상대 국가 선수에 대한 긍정적 보도는 네이버에서 8.6%에 그쳤고, 야후제팬에서는 34.3%에 달했다. 특히 네이버에 게재된 한국 언론들은 아사다 마오 선수에 대한 보도 대부분(64.7%)을 부정적 내용의 기사로 채웠다.   

   
▲ ⓒ이윤경, 정수영
 

   
▲ ⓒ이윤경, 정수영
 
이 같은 한국 언론의 ‘습관’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상당수 언론들은 “김연아가 계속 선수생활을 한다면 애국가를 외워버릴지도 모르겠다”는 ‘한 네티즌’의 반응을 중요하게 다뤘고, 이를 두고 “일본 네티즌들도 이제는 두 손 두발을 다 든 모양”(일간스포츠)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적지 않은 한국 언론들은 이처럼 일본 포털 사이트에서 자의적으로 선택한 일본 ‘네티즌’들의 반응을 묶어 ‘애써 담담했다’고 정리하며 은근한 우월감을 내비쳤다. 
 
언론에게 필요한 건 국가주의적 ‘선동’이 아니라,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최동호 평론가는 “국민들은 김연아 선수가 예쁘고 아름다우니까 환호하고 열광할 수 있다”면서도 “이런 기회에 유망주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어떤 지원을 할 것인지, 인프라를 어떻게 확장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늘 ‘한 차례 열풍’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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