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youtube.com/watch?v=ccY5IcwWyV8
피아졸라, 1989년 영국 BBC 출연, 생방송 공연

김연아가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게 팬들은 못내 아쉽다. 경기가 끝나고 일주일이 돼 가는데도 편파 판정 얘기가 사그러들 줄 모른다. 재심을 촉구하는 서명이 300만명에 육박했고, 익명의 심판이 양심선언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결과 발표 후 30분 안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돼 있는데 관계자들은 뭘 하고 있었냐는 질타가 이어졌다.

채점 규정을 잘 모르지만 내 눈에도 김연아가 나아 보였다. 소트니코바는 고난도 묘기를 나름 잘 소화해 냈지만 김연아의 예술적 표현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예상 밖의 결과에 고개를 갸우뚱했던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작 화면에 비친 김연아 자신은 의연했다. 김연아라고 메달 순위에 무관심할 리 없었다. 아니, 마지막 무대를 금메달로 화려하게 매듭짓고 싶다는 열망이 누구보다 강했을 것이다.

김연아는 그냥 담담히 미소 짓고 있었다. 피겨 스케이팅이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순위가 어떻게 나오든, 자신은 최선을 다했고 기량을 맘껏 발휘했으니 당당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받는 모습 ⓒ 연합뉴스
 
언론은 늘 메달 순위가 관심이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소감을 기자들이 물어볼 때마다 김연아는 그냥 “메달이구나…” 대답, 멋진 말을 기대했던 기자들을 머슥하게 만들었다. 언론은 동갑내기 아사다 마오를 이겨야 한다고 언제나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정작 김연아는 아사다와 경쟁한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대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절대와 완벽을 향한 무한 노력 앞에 타인과의 경쟁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2분 50초의 쇼트 프로그램과 4분 10초의 프리 스케이팅, 그 최고의 7분을 위해 김연아는 13년 동안 하루 8시간 이상 연습했다. 어린 김연아가 자기를 이기기 위해 쏟은 노력은 우리 평범한 어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김연아의 7분 드라마>에 나오는 한 구절.

“훈련을 하다 보면 늘 한계가 온다. 근육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순간.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순간. 이런 순간이 오면 가슴 속에서 뭔가가 말을 걸어온다. ‘이 정도면 됐어’, ‘다음에 하자’ 하는 속삭임이 들린다. 이런 유혹에 문득 포기해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확신에 찬 김연아의 이어지는 말, 다시 들어도 우리를 숙연케 한다.

“하지만 이 때 포기하면 안한 것과 다를 바 없다. 99도까지 열심히 올려놓아도 1도를 올리지 못한다면 물은 끓지 않는다. 물을 끓이는 마지막 1도, 포기하고 싶은 그 마지막 1도를 참아내는 것이다. 이 순간을 넘어야 다음 문이 열린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갈 수 있다”

김연아가 마지막 프리 경기에서 사용한 음악은 탱고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의 <아디오스 노니노>, 최상의 무대에 어울리는 최상의 음악이었다.

1959년 10월, ‘아르헨티나 탱고단’을 이끌고 푸에르토리코에서 공연하고 있던 피아졸라는 아버지 빈첸테의 부음을 듣고 뉴욕에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이 곡을 써 내려갔다. 5년 전 파리에서 작곡한 <아버지>(Nonino)의 선율을 살려 추억과 애도의 마음을 담았다. 이 곡을 ‘탱고의 레퀴엠’이라 부르기도 한다.

   
▲ 아스토르 피아졸라
 
“안녕, 아버지…” 아들 아스토르가 탱고를 하도록 이끌어 주었고, 8살 난 아들에게 19달러 짜리 반도네온을 사 주었고, ‘아르헨티나 사람’이 되라고 늘 가르쳐 주신 아버지…. 그의 죽음은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음악이 거듭나는 전환점이 된다. 그 동안 키워 온 클래식과 재즈에 대한 사랑을 탱고와 결합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

<아디오스 노니노>는 20여 종류로 편곡되고 수천 번 연주되어 ‘보석 중의 보석’이란 명성을 얻었다. 여러 악기 편성으로 연주되지만, 피아졸라는 자신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5중주(반도네온, 바이올린, 베이스, 피아노, 전자 기타)를 가장 좋아했다. 이 곡에 대해 피아졸라는 말했다. “아마도 나는 천사들에 둘러싸였던 것 같다. 나는 최상의 곡을 작곡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보다 나은 곡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김연아의 마지막 무대, 우승했으면 화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메달 색깔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연아는 아름다웠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며 최선을 다하는 김연아는 자기 절대 기준으로 언제나 최고였다. 남들보다 앞서야 살아남고, 상대를 짓밟고 올라가야 성공했다고 칭찬하는 속물스런 세상에 김연아의 마지막 무대는 신선한 빛을 던져주었다. 캐스터와 각 언론은 입을 모아 클로징을 날렸다. “아디오스, 김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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