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등 중 는 20에서 70mm. 내일도 고상은 이어지겠습니다.” “서울이 15도에서 출발해 덥겠고요. ‘그 외~~~~~~~~’”. “피겨여왕 김연아가 금메달 목강신화를 이뤘을 때도”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이혜 대통령은” “핵무 대통령은 임기 중”. 

암호처럼 보이는 이 표현들은 리모컨 설정을 통해 볼 수 있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방송자막 내용이다. 장애인 관련 독립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정승천 감독(에이블뉴스 객원기자)이 장애전문매체 에이블뉴스 기고를 통해 지적한 사례다.

오탈자가 속출하는 건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증권소식이나 주요뉴스 소개, 노래가사 등 멘트가 빠르게 흘러가거나 내용이 어려운 경우 짧게는 몇초, 길게는 1~2분 이상 자막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정진호 한국농아인협회 자막방송지원센터 본부장은 “가장 많은 민원이 들어오는 게 자막방송 문제”라며 “오탈자가 많은 것도 문제지만 자막이 방송이 나가고 5~6초 후에 나오다보니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힘들고, 곳곳이 타이핑이 안 되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지적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방송에서 아나운서가 한 마디라도 잘못 나가면 사과를 하지만, 자막방송에서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 국회 속기사의 모습. 사진은 기사내용과 관계없습니다. ⓒ 연합뉴스

청각장애인의 귀가 되는 방송자막
자격증 없는 40만원짜리 인턴이 만들어

왜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방송은 사고가 잦고 질이 낮은 걸까. 장애인 방송자막 제작 속기업체 전현직 관계자들은 공통적으로 ‘숙련자가 탄생할 수 없는 열악한 노동환경’을 문제로 꼽았다.  

지상파, 종편, 흔히 케이블채널이라고 불리는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 등은 방송법에 따라 대부분의 방송편성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을 제작해야 한다. 방송사 입장에서 자막방송은 2012년 방송법 개정 이후 전면도입된 것으로, 기존에 담당하던 업무가 아니다보니 대다수가 속기업체에 방송자막 업무를 외주를 맡기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회사에 갓 들어온 신참들은 임금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돈을 거의 받지 못한다. 방송자막 속기사가 되기 위해선 2~3달 연수생 생활을 거친 뒤 인턴이 된다. 인턴을 거친 이후에야 정식 직원이 될 수 있다. 장애인 방송자막 속기업체에서 일을 했던 김아무개씨는 “처음에는 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훈련 겸 연수를 받는다”면서 “연수생은 월급 20만 원과 식비 정도가 지원된다. 우리는 그나마 식비라도 주지만 다른 업체는 이것마저 주지 않는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인턴은 사실상 속기 자격증이 없는 ‘초짜’가 많다. 그러나 곧바로 방송자막을 만드는 등 실전에 투입된다. 이때부터 월급을 받기 시작하지만 40만~50만 원 선으로 서울에서 월세조차 감당하기 힘든 액수다. 인턴은 하루 업무 4~5시간씩, 한 달에 18~20일씩 일을 한다. 업무시간이 적은 편이지만 인턴 때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기 때문에 업무와 별도로 연습시간을 가져야 해 다른 일을 병행하기 힘들다.

연수생, 인턴 과정이 길고 인턴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정직원이 되는 것도 아니다보니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 크레딧잡에 따르면 한 방송자막 속기업체의 올해 입사자는 ‘47%’, 올해 퇴사자는 ‘147%’로 나온다.

정직원을 뽑는 기간이 들쭉날쭉한 것도 문제다. 인원공백이 생기게 되면 인턴 1~2달 만에 정직원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1년 가까이 인턴 생활을 한 경우도 있다. 기간이 길어지면 사람들이 떠나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기간이 짧아져도 문제가 있다. 김아무개씨는 “인턴에서 바로 정직원이 되면 그만큼 업무 숙련도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신기한 건 열악한 처우에도 이상하게 연수생들이 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속기업계의 독특한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속기사가 되려면 200만 원에 달하는 키보드 종류를 선택해 구입하고, 교육을 받고, 업체에 취업을 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업체 모두 키보드 제작, 속기 협회, 속기업체를 운영하면서 이 모든 과정을 총괄한다.

▲ 사진은 기사내용과 관계없습니다. SBS 8뉴스의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방송.
따라서 방송자막 속기사가 아닌 관공서 속기사가 목표라고 하더라도, 업무를 주선해주는 교육기관에 잘 보이기 위해서는 방송자막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한 누리꾼은 ‘속기사의 현실’이라는 글에서 “속기사로 일하기 위해 2년여 간 자격증 공부를 해야 합니다. 200만 원이 넘는 기계도 사야 하죠”라며 “학원 원장님에게 잘 보여야 여기저기 소개해 주고, 학원 원장님은 학생을 자막방송에 먼저 추천하려고 합니다”라고 밝혔다.

정직원 돼도 처우 나빠 “떠날 수밖에 없다”

정직원이 된다고 해서 업무환경이 크게 개선되는 건 아니다. 1~2년 일을 하다 떠나는 경우가 많다. 이 가운데서도 연수생들은 쏟아지다보니 숙련자들이 나오는 건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일 수밖에 없다. 질 낮은 자막이 나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또 다른 속기업계 관계자는 “속기 자격증은 1~3급까지 있는데, 방송자막을 맡는 건 1급이 아닌 2~3급 속기사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김아무개씨 역시 일을 오래 하지 못했다. 속기공부를 해온 그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방송자막을 제작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면서 방송자막 속기 업무를 택했다. 그러나 입사 1년 후 그만뒀다. 다수의 방송자막 속기사들이 그와 같은 이유로 떠났다. 김아무개씨와 함께 입사한 연수생은 20명 가량인데, 그 중 10명 안팎만 인턴이 됐고, 현재까지 속기 일을 하는 사람은 6명에 불과하다. 

김씨가 방송자막 속기업계를 떠나게 된 이유 역시 턱 없이 낮은 임금 때문이다. ‘평균예상연봉 1452만 원’. 크레딧잡에서 방송자막 제작회사 중 한 업체를 검색하면 믿기 힘든 숫자가 나타난다. 두 업체 모두 방송자막 속기사 월급은 평균적으로 세전 기준 150만~160만 원 수준이다. 여기에 매해 임금이 5~10만 원 정도 인상되는 식이다. 정규직이 되면 업무량이 늘어난다. 한 달에 18~20일씩 하루 9시간~10시간 일을 한다. 

임금에 비해 업무강도도 높다. 한 업체의 경우 지역 민영방송팀 오전조는 6시30분까지 출근을 하고 오후 4~5시까지 일을 한다. 오후조는 오전 11시30분까지 출근해 밤9시까지 일한다. 그 중 쉬는 시간은 식사시간 1시간이 사실상 전부다. 때에 따라 30분에서 1시간 휴식시간을 줄 때가 있지만 전혀 없을 때도 많다. 새로운 방송사의 자막방송을 따내게 되면 의무적으로 출근을 시켜 연습을 강요하는데, 연습시간은 임금에 반영되지 않는다.

처우가 안 좋으면 다른 방송자막 속기 업체로 옮기면 될 것 같지만 다른 업체도 사정이 비슷할뿐더러 일반 기업과 달리 방송자막 속기사 사이에는 이직을 한다는 개념이 없다. 현직 속기사인 박아무개씨는 “두 회사가 이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는데 카스와 소리자바는 키보드 배열이 완전히 다르다. 소리자바에서 속기사 자격증을 땄더라도 카스에 가면 업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방송자막 속기사를 그만 두면 프리랜서 속기사가 되거나 관공서 속기사 취업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 종일 자막 작업을 해야 하는 속기사 특성상 손목, 어깨, 목 등의 업무질환이 잦지만 다쳐도 병원비 지급이 되지 않는다. 김씨는 “손목이 아파 정형외과를 다녀오곤 했다”면서 “나 같은 경우는 주사를 맞았는데 당연히 병원비 지원을 받지 못했다. 다른 직원은 아파도 손목에 압박붕대 같은 걸 차고 일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안 다치려면 알아서 업무 중간 중간에 무리가 안 가도록 몸을 푸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해 주는 건 주기적으로 스트레칭을 시키는 게 전부다.

오탈자, 방송 사고는 예고된 재앙

잦은 오탈자에 대해 물었다. 김아무개씨는 “속기사들도 처음 듣는 말을 바로 치는 건데 모든 말을 한번에 알아듣고 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자막 퀄리티가 낮으면 연습을 하면 늘겠지만 문제는 인턴에서 그만두는 사람이 많아 계속 새로운 인턴들이 작업을 맡고, 정직원이 돼도 처우가 좋지 않아 사람이 계속 교체가 되니 퀄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악순환인 것이다.

속기 작업을 할 때 언론의 데스킹처럼 검수절차가 미비한 것도 문제다. 미리 방송사가 영상을 보내주는 경우 5명이 동시에 한 프로그램 작업을 하지만 크로스체크 개념은 없고 자신의 할당량만 작성한다. 오탈자가 나도 고쳐지기 힘든 이유가 이 때문이다. 

속기업계에서 사전에 방송사에서 보내지 않아 TV방송을 보면서 자막을 쳐야 하는 건 ‘생방송’이라고 불린다. 이 경우 TV를 보며 실시간으로 2인 1조로 속기를 하게 된다. 지역민영방송을 담당하는 업체의 경우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 자막을 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제주지역 민영방송 프로그램 자막을 만드는 날에는 다들 긴장을 하게 된다. 

어려운 용어 역시 알아듣지 못하고 넘기게 된다. 김씨는 “한 친구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고 해서 물어본 단어가 있는데 ‘나사렛’이었다. 기독교를 잘 모르면 알기 힘들 수 있다. 만약 나도 이 단어를 몰랐다면 자막이 안 나가는 거다. 당시는 사전자막이라 내가 대신 듣고 칠 수 있었지만, 생방송 작업을 하게 되면 그럴 틈도 없다”고 말했다. 

아예 방송이 송출되지 않거나 다른 프로그램 자막이 잘못 나가는 큰 방송사고도 잦다. 자막이 안 나가는 건 자막송출업체에서 자막을 제때 보내지 못 했거나, 자막을 쓰지 못한 경우다. 사전에 타이핑한 영상을 내보낼 때는 다른 프로그램의 자막을 잘못 입력할 수도 있다. 김아무개씨는 “한 달 기준으로 봤을 때 새벽에는 3~4일에 한번정도 방송사고가 난다. 사고가 적을 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라고 말했다.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 상기시키곤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나중엔 초심이 사라지고 대충하게 된다. 지금도 장애인 방송자막제작은 중요한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구조가 유지되면 실력 있는 사람들이 떠나고 퀄리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자막을 보고서도 ‘무슨 말이지?’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거다.” 김아무개씨의 지적이다.

인터넷에서도 방송자막 속기를 그만둔 이들의 글을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혹시나 자신이 잘못 될까 회사 바로 옆에 있는 노동청에 발도 들이지 못했고, 그저 묵묵히 일만 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등이다.

정진호 한국농아인협회 자막방송지원센터 본부장은 “업체들이 12월에 방송사와 계약을 갱신하는데, 보통 1~8월까지는 퀄리티가 엉망이고, 10월이 되면 오탈자가 줄고 사고가 덜 난다”면서 “이런 문제를 막으려면 자막에 대한 질적인 평가를 해야 하는데, 현재는 편성 양만 평가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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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자막방송을 총괄하는 방송통신위원회는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방통위 방송기반국 시청자지원팀 관계자는 “장애인 자막방송을 용역을 줘서 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고용행태에 대해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있지 않다”면서 “방통위는 장애인 방송 의무편성비율을 할당하고, 그만큼 방송을 했는지 평가하는 게 역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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