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부도난 지 어언 2년. 연일 ‘대우사태’로 뉴스가 도배되던 1999년 10월13일, 그날은 맑았다. 이영임씨는 서울 마포구 도화동 한국전력 앞에 ‘작은집’을 마련했다. 한가을, 저녁엔 쌀쌀하니 천막을 내리면 이슬이 송골송골 맺혔다.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밤 깊은 마포종점’ 인근이다. 사라진 전차 종점이지만 언젠가 이곳은 ‘강 건너 영등포 불빛’을 바라보며 ‘비에 젖어 갈 곳 없는’ 이들을 감싸주던 곳이었다. 

이씨는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보내는 여길 ‘작은집’이라 불렀다. 이삿짐센터 일을 하던 남편의 몸이 많이 망가지면서 개별화물 넘버를 잃었다. 생활이 안 되는데 애들은 가르쳐야 했다. 밥은 먹고 살겠거니, 5년만 할 생각이었다. 친척이 하던 걸 이어받았다. 그땐 바람을 막으려 내린 ‘포장’이 여덟 개였다. 손님도 많았다. 지금보다 넓었던 도로변에 차를 대고 많이들 한잔하다 대리운전을 불러 가곤 했다. 

작은집엔 오후 6시부터 손님들이 온다. 4시면 출근해 남편이 ‘마차’를 한전 앞 인도로 이동해주고 무거운 물건도 옮겨줬다. 호떡을 팔만한 작은 마차는 사람이 밀어 옮기지만 이 ‘작은집’은 모터가 달려있어 ‘운전’을 한다. 끝나면 다시 남편이 나와 뒷정리를 도와주고 같이 ‘큰집’으로 돌아가 눈을 붙였다. 초창기엔 밤새 손님이 있었지만 몇 년 전부턴 새벽 1시에도 발걸음이 끊겼다. 여덟집은 여섯집으로 줄었다. 

여름마다 오던 일본인 손님이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재작년 여름이 마지막이었다. 비즈니스 한다고 하나둘 데려와 소개했다. 한국말을 못해 손짓발짓으로 띄엄띄엄, 맛있다고 했다. 초콜릿 선물을 가져온 적도 있다. 가끔 얼굴을 비치던 중국인 손님도 기억했다. 푸짐하게 시켰었다. 이씨네는 6번집, 끝집이라 자연스레 찾는 손님도 있었다. 인터넷에선 ‘염리초 앞 포장마차거리’로 유명해 직장인들이 많이 찾았다. 

옆집 한옥순씨는 올림픽을 준비하던 33년 전 이곳에 왔다. 학교 다닐 나이에 ‘식모살이’하러 상경했고 식당과 공장을 전전하다 마차를 마련했다. 그땐 스무집이 넘었다. 포차거리 맞은편이 ‘진주아파트’였던 시절이다. 1988년 터 잡자마자 철거당한 적이 있다. 국제행사를 앞둔 그땐 거리 곳곳을 밀어내기 바빴다. 

긴 세월만큼 험한 꼴도 여러 번 당했다. 진주아파트가 재건축으로 대기업브랜드 아파트가 된 뒤니까 10년이 좀 더 됐을까, 청와대 주인이 바뀐 신호 같았다. 이씨의 말이다. “일부러 여자들도 투입시켰지. 한 300명은 됐는데 포크레인·지게차까지 쳐들어와 마차를 납작하게 눌러 빗자루 하나까지 안 남기고 쓸어갔는데. 새카만 양아치들. 뭐 설득이나 대화도 없고, 깨끗한 거리 만들겠다나” 

▲ 마포구 염리초 앞 포장마차 거리에서 과거 장사하던 이영임씨 모습. 사진=서울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서부노련) 제공
▲ 마포구 염리초 앞 포장마차 거리에서 과거 장사하던 이영임씨 모습. 사진=서울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서부노련) 제공

 

포장마차는 모순의 공간이다. 쓰레기처럼 치워버릴 땐 언제고 선거 때가 되면 여야 없이 노점상을 방문한다. ‘정치인들이 여기도 오냐’는 질문에 이씨는 “그럼요. 한 표 부탁하고 가는 사람들 많은데 나중엔 막상 즈그들이 나몰라라 하는거지”라고 했다. 선거땐 당선행 첫번째 정거장 같으면서도 평소엔 무심(無心), 철거당할 땐 무시(無視)의 대상이다. 

단속을 명분으로 불법과 폭력을 일삼는 구청을 탓하는 이는 없었다. 노점위치에 따라 단속기준이 다른 것도 의문이다. 두더지 잡듯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단속하는 건 불공평하지 않나, 상인들끼리만 중얼거린다. 이명박 정권 초 난리통 이후론 6만원씩 두 번, 1년에 12만원 내던 도로점용료(변상금)를 안 걷는 것도 웃긴 일이다. 대신 점포를 임대해 장사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 심지어 백종원씨한테 컨설팅을 받아 새 메뉴를 개발해보라는 훈수까지 듣는다. 말이 쉽다. 

“그 누가 노점상을 하고 싶어 하느냐/ 처자식 먹여 살리려 거리에서 장사한다”(늙은 노점상의 노래), “하루 벌어 하루살이 노점상 인생/ 노점상이 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이놈의 세상이 거꾸로란 걸”(노점상인생), 노점상인들의 노래가사 중 일부다. 백종원을 만나 조언받을 만했다면 진작 점포 얻어 사업을 했지 길거리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ILO(국제노동기구)는 2002년 노점상 등 비공식 경제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권리를 보장하라고 국제결의를 했지만 말 그대로 다른 나라 얘기다.

▲ 마포구 염리초 앞 포장마차 거리에서 마차를 빼앗기기 전 장사하던 이영임씨 모습. 사진=서울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서부노련) 제공
▲ 마포구 염리초 앞 포장마차 거리에서 마차를 빼앗기기 전 장사하던 이영임씨 모습. 사진=서울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서부노련) 제공

 

“월세 내야지, 인건비 나가야지, 지금 여기서 혼자 하는 것도 힘든데. 거기다 코로나로 기존 점포들도 망하는 분위기이고. 내가 포장마차 하면서 조카 식당을 5년을 도와줬어요. 투잡인데, 거길 도와줘서 일으켜 인수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할 수가 없게 됐고. (상인 6명이) 다들 여기서 20~30년 장사했는데 이 나이에 어딜 가요.” 이씨의 말이다.

가장 젊은 이씨가 65세, 나머지는 대부분 70대다. 77세도 두 명이다. 이씨는 무릎 연골이 다 닳아 뼈가 서로 닿는다. 서서 일하다 보니 다들 허리와 무릎 통증은 기본 증상이다. “앞으로 하면 몇 년이나 하겠어요. 젊은 사람들도 코로나에 더 힘든데. 굳이 코로나 때 마차를 가져가야 하나 싶네요.”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몫을 찾아주는 게 ‘정치’라면 정치는 실종했고 길거리 질서유지의 ‘치안’만 남았다.

“포차는 우리 문화로 외국에도 알리는 것 아니냐”, “외국엔 가서 그렇게 장사도 하고 하는데 정작 한국에선 왜 못하게 하고 없애냐” 상인들은 외국에서 연예인들이 포차를 운영하는 예능프로 ‘국경없는 포차’를 종종 말했다. 제작진은 홈페이지에 “한국의 맛과 정을 듬뿍 실은 포장마차” “따끈한 정이 담긴 길거리 음식과 시원한 소맥 한잔”, “국경을 넘어간 닭똥집과 소주는 과연 통역이 될까요”라고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 예능프로그램 '국경없는 포차' 홈페이지 갈무리
▲ 예능프로그램 '국경없는 포차' 홈페이지 갈무리

 

소설가 박완서의 단편 ‘도둑맞은 가난’에서 사업실패로 가족이 동반자살해 혼자 남은 ‘나’는 공장노동자 상훈과 동거한다. 사실 상훈은 공장에 위장취업해 가난을 체험하는 부잣집 대학생이다. 뒤늦게 상훈은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며 ‘고생을 모르는 걸 걱정해 아버지가 가난체험을 권유했다’고 말한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좋은 경험이었다’는 그간의 소감과 ‘월세와 연탄비 아끼려 남자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뻔뻔한 충고에 ‘나’는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부자들이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위해 가난마저 훔친다는 걸 깨닫는다. 

상인들이 ‘국경없는 포차’ 얘기를 자꾸 꺼내는 건 서글픈 일이다. 찬바람을 막아주는 천막을 언제 걷어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온전히 상인들의 몫인데 TV엔 상인들을 제거했다. 연예인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가난마저 빌려가 예능으로 활용하는 이 프로그램에라도 상인들은 기대야 했다. 이들에겐 삶을 직시할 여유도 이유도 없고 편들어주는 정치인 하나 없다. 노점은 멀리서 보면 낭만의 공간, 가까이서 보면 불안정 그 자체다. 

촛불을 들고 정권이 바뀌더니 세상이 달라졌단다. 진짜 그랬다. 지난해 9월, ‘상생’을 말하던 구청은 거리에 세워둔 마차 5대를 ‘몰래’ 가져갔다. 용역·폭력·충돌 따윈 없었다. 포장마차는 한여름 더위를 피해 잠시 장사를 쉰다. 더위가 한풀 꺾이자 코로나가 심해졌다. 조금 더 쉬어달라는 구청 요청에 협조했다. 그러던 사이 마차를 실어갔고 그 자리에 대형 화단을 세웠다. 공간을 성형하려는 구청의 선전포고다.

생존을 잃은 상인들이 반격했다. 화단까지 세워둔 건 아예 장사를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라고 생각했다. 화단을 저쪽으로 치우고 마차를 가져간 구청에 항의했다. 다른 지역 노점상인과 함께 구청 앞에 모여 집회라도 해야 했지만 코로나로 모일 수가 없는 상황. 곰인형 수십개를 깔아놓고 대신 시위를 시켰다. 지난해 10월 한씨는 빼앗긴 마차를 찾고자 구청 앞에서 유방암 수술 이후 다시 자라난 흰머리를 다 밀어냈다. 

▲ 지난해 9월 빼앗긴 마차를 돌려달라며 삭발을 한 노점상인 한옥순씨(오른쪽) 사진=서울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서부노련) 제공
▲ 지난해 9월 빼앗긴 마차를 돌려달라며 삭발을 한 노점상인 한옥순씨(오른쪽) 사진=서울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서부노련) 제공

 

▲ 지난해 마포구청 앞에 노점상인들이 코로나로 집회가 어려워지자 곰돌이인형으로 시위를 대신하는 모습. 사진=서울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서부노련) 제공
▲ 지난해 마포구청 앞에 노점상인들이 코로나로 집회가 어려워지자 곰돌이인형으로 시위를 대신하는 모습. 사진=서울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서부노련) 제공

 

“술을 팔지 말라” 마포구청이 마차를 가져간 이유다. 보통 마차를 짜는데 600만~700만원, 천막과 받침대 등 1000만원은 족히 든다. 이씨는 마차를 빼앗기고 잠을 설친다. 속에서 뜨거움이 차오를 때가 있다. 병원가 상담을 받고 진정제를 먹는다. “미리 계고장이라도 붙였다면 마차 안에 요리재료라든지 원래 먹던 관절약, 영양제, 동전도 다 모아놨는데 그런 거 빼놨을 텐데…” 

코로나 탓인지 지난해 3월부터 손님이 줄었고 여름 휴식기인 8월 이후론 아예 장사를 못했다. 온몸이 성치 않으니 약값이라도 내 손으로 벌겠다며 꼬박꼬박 장사하던 일상이 끊겼다.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거나 보험사 약관대출로 근근이 하루를 버틴다. 마차는 1000만원이 아니라 유일한 재산이자 생존수단이다. 

법, 집값, 민원. 
세상엔 밥보다 중요한 게 많았다. 

지난해 9월 마차를 빼앗긴 마포 한전 앞 노점상인들은 “이제껏 구청에서 술 판매를 문제 삼은 적은 없었다”고 주장했고 마포구청 측은 “수도 없이 알렸다”고 반박했다. 상인들은 “코로나를 기회로 노점을 없애는 것”이라고 했고 구청은 “이젠 분식으로 메뉴를 바꿔달라”고 했다. 양측의 대화는 만나지 못했다. 지난 1월15일 오전 10시 구청 1층 로비 앞 상황이다. 

“떡볶이 팔아서 우리 생활이 유지되면 뭐하러 힘들게 밤에 장사를 해”
“분식을 하다가 안 되면 (저희가) 지원을…”
“(포장마차를) 되게끄름 해줘야지. 그 자리에서 30년씩 해왔는데”
“30년 동안 법적으로 문제 있었던 걸 이젠 아셨잖아요”
“검사들도 와서 먹고 국회의원들도 와서 먹었는데”
“없어지는 추세이고 술 판매는 허가를 받아야죠”
“30년간 해왔는데 이제와서”
“예전에는 몰라서 암암리에 장사를 한 거고요”
“그럼 상생위는 왜 만들었냐고”
“상생위가 법 위에 있는 건 아니죠”“마차는 우리 재산인데 왜 안 돌려주고”
“책임질 수 있는 분이 와서 (술 안 팔겠다고) 약속하면 돌려드릴게요”
“장사 쉬어달라고 해서 쉬었는데 그새 마차 가져갔죠?”
“서울시에서 (쉬어달라고) 요청한 거죠. 근데 항상 도로에 세워놓으니까요.”
“그럼 범칙금을 청구해. 도로점유세 낼테니”
“나중에 찾아가실 땐 1㎡당 10만원씩 부과될 거에요”
“자꾸 법법 하지마요. 없는 사람들이 법 더 잘 지키니까”

실은 지난해 가을에서 겨울내내 수시로 벌어진 풍경이다. 상인들은 법의 언어로 구청을 이기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불투명한 미래 못지않게 이들을 괴롭히는 건 조여오던 과거의 경험이다. 구청의 요구를 듣더라도 언젠가 다시 밀려날 걸 상인들은 알았다.

▲ 지난해 1월 마차를 돌려달라며 마포구청에 항의하고 나서 1층 로비에 주저 앉은 노점상인들. 사진=장슬기 기자
▲ 지난해 1월 마차를 돌려달라며 마포구청에 항의하고 나서 1층 로비에 주저 앉은 노점상인들. 사진=장슬기 기자

 

이명박 서울시장이 취임한 2002년, 억울함을 풀지 못한 노점상인 박봉규 열사가 분신한 걸 봤다.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를 앞두고 행정대집행에 맞서던 노점상인들이 다치거나 구속되는 걸 봤다. 동대문운동장 터로 이주시켜 방치한 서울시의 모습을 봤다.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취임하자 동대문운동장을 허물고 청계천 2차 복원을 추진한다며 다시 노점상들을 이주시킨 걸 봤다. 이주해서 상권이 사라지면 노점도 무너진다는 걸 봤다. 

2007년 서울시는 ‘디자인 서울정책’이라며 ‘노점상종합관리대책’을 내놓았다. 지하철역·횡단보도 옆 3m 금지처럼 세세하게 제시했다. 노점면적이나 운영시간까지 정했다. 이를 언론에 흘리고 노점상을 파격적으로 줄여가는 모습을 봤다. 같은해 10월 경기 고양시 노점상 이재근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씨를 노점상인으로 만든 건 IMF사태였고, 이씨의 죽음은 그의 배우자까지 때린 400여명의 용역깡패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감지했다. 

상인들은 자신들이 ‘비공식’의 존재라는 걸 안다. 행정이 만든 질서가 언제나 ‘공식’이라는 것도 안다. 공식이 용역이라는 비공식을 동원했고, 법이 폭력이라는 불법을 포함했다. 2009년 마포구 건설관리과는 예산 6억5000만원 중 절반 가까이 노점단속에 썼다. 상인들은 공평한 법집행이라는 공식이 자신에겐 예외라는 걸 안다. 행정이 내킬 때만 법을 적용해도 주민의 지지를 받는 걸 안다. 기존 노동시장에서 쫓겨나 노점을 차리는 순간 공식 사회안전망에서도 밀려난다. 

그래서 2017년 아현고가 밑 노점상을 폭력으로 밀어낼 때, 염리초 앞 포장마차 상인들은 장사를 접고 아현동을 찾았다. 이씨는 “한곳이 쓰러지면 전체가 쓰러지니까”라고 연대의 이유를 말했다. 마포구청 관계자는 “아현동 좌판 노점은 다 없앴고 두 곳은 가게를 얻었으며 박스형으로 7개 남았다”고 말했다. 

이젠 노점을 ‘거리가게’라고 부른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거리가게 가이드라인’은 통제 대신 관리, 강제퇴거 대신 자연도태의 방식을 택했다. 2019년 마포구는 상생위원회를 만들고 노점상인을 위원으로 위촉했지만 포차 논란의 최대 쟁점인 술판매 문제는 다룬 적이 없다. 실질적으로 회의가 열린 적도 없다. 마포에서 꼼장어에 소주한잔 기울일 포장마차는 이제 없다. 거리의 상인들이 더 이상 갈 곳도 없다.

공간에도 우생학이 작동한다. 과거 정치권력이 ‘보기 싫다’는 이유로 노점을 밀어냈다면 이제 더 높은 아파트가격을 위해 노점상은 조용히 밀려나야 할 존재가 됐다. ‘주민들도 동네에 술 한잔할 포차하나 있으면 좋아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구청 관계자는 질색하는 얼굴이었다. 구청 측은 민원이 적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주민들은 예전에 그 주민이 아니다.

한국전쟁 피란민이 터 잡아온 아현동 노점은 2017년 쫓겨났다. 2005년 아현뉴타운으로 지정됐던 근방엔 푸르지오 등 고급아파트단지가 대규모로 들어섰다. 염리초 옆 진주아파트는 재건축 결과 자이아파트로 변신했다. 마포는 용산·성동와 함께 강남 아파트값 추격자로 자리잡았다. 

이씨는 구청이 떡볶이로 메뉴를 바꾸면 박스형 새 노점을 지원해주겠다는 말에 달가워하지 않는다. “손님들이 먹을 자리가 없어요. 쪼끄매. 떡볶이 판다고 달라질랑가. 또 위생이 어쩌고 불량식품 파네 걸고 넘어지려면 걸지” 근방에서 붕어빵을 팔던 할머니가 있었는데 역시 지난해 구청의 요구로 장사를 접은 이야기도 꺼냈다. 구청 관계자는 “기존하던 분들만 관리하고 노점상 신규진입은 금지한다”고 했다. 

소상공인 지원에서 노점상 몫은 없었다. 4차 재난지원금에 와서야 노점상인도 포함하자는 말이 나왔다. 이씨는 “우린 해당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언론과 여론에서 벌떼같이 달려들어 노점상에 지원금을 주지 말자는 논지를 폈다. “사업자등록도 해야하고,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지”라며 손을 휘저었다. 

마포구는 아직 기준을 정하지 않았지만 보통 구청은 3억원 이상 자산이 있으면 노점상을 금지한다. 사실상 집이 있으면 쫓겨나는 셈이다. 최근 언론보도만 보면 정부가 지원금을 주기 위한 단순 행정절차로 사업자등록을 요구하는 것 같지만 응하는 순간 구청이 짜주는 작은 박스안에서 조리공간만 겨우 확보한 채 구청이 원하는 메뉴로 장사를 해야 한다는 걸 안다. 재산기준에 걸려 쫓겨나거나 상권이 죽어 소멸하거나 둘 중 하나다.  

정부는 지난 5일부터 노점상 4만명에게 재난지원금 50만원씩 지급하겠다고 했다. 50만원 받으려고 목줄을 내놓을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이씨는 영등포역 맞은편도 이런 과정으로 노점을 정리한 것을 말하며 “남은 마차도 몇 대 안 되는데 장사를 못하게 돼 세상을 떠나는 분들은 언론에 나오지도, 어디 흩어졌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마차를 빼앗긴 지 반년, 지난 2월초, 설연휴가 끝나면 영업시간 제한이나 거리두기 단계가 풀릴 거라 기대했다. 그러면 분식이라도 일단 장사를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3월초 마차 안에 있던 물건만 간신히 찾아왔다. 술 판매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마차를 주겠다고 했지만 상인들은 일단 각서를 쓰지 않았다. 분식을 팔 작은 마차를 구했다. 포차를 하던 ‘작은집’보다 더 작은집이다. 

▲ 빼앗긴 마차를 돌려받지 못한 상인들은 다른 마차를 구해 지난달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한옥순씨와 황희성씨(오른쪽)의 모습. 사진=장슬기 기자
▲ 빼앗긴 마차를 돌려받지 못한 상인들은 다른 마차를 구해 지난달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한옥순씨와 황희성씨(오른쪽)의 모습. 사진=장슬기 기자

 

지난 3월12일 떡볶이·순대·어묵·파전으로 하는 첫 장사를 시작했다. “코로나 때문에 집회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자리라도 지키려면”, “장사가 잘 안될 건 알지만”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라고들 했다. 노점상의 가장 어려운 점은 공간을 지켜내는 일이다. 자리가 밥줄이다.

함께 마차를 빼앗긴 이웃 황희성씨는 ‘작은집’을 차린 지 40년이 넘었다. 그도 첫날을 정확히 기억했다. 1980년 10월27일. 황씨도 이씨처럼 가을 어느날 거리에서 장사를 시작했고, 구청은 그런 이들의 유일한 생존수단인 마차를 가을에 가져갔다. 이들 6명, 지난 겨울을 마포구청 1층 차가운 로비에서 지냈다. 봄이 왔지만 이들은 결국 마차를 돌려받지 못한 채 장사를 시작했다. 

분식장사 사흘째, 옆에서 한씨가 “어제 우리 여섯집 다 합해서 3만원 팔았어”라고 외쳤다. 황씨는 고요한 봄 거리를 초점 없이 쳐다봤다. 온몸이 ‘바근바근하다’던 황씨는 “어제 허리에 주사를 7방 맞고 왔다”고 했다. 황씨 앞에 놓인 철판에 떡은 쫄깃했지만 고추장 양념은 떡이 배어들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말라붙었다. 

“벚꽃이 피면 주말에도 나와 장사하겠다”던 황씨는 벚꽃이 다 떨어질 때까지 장사하러 나오지 못하고 있다. 

▲ 마차를 빼앗기기 전 벚꽃이 만개한 '염리초 앞 포장마차 거리' 모습. 사진=서울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서부노련) 제공
▲ 마차를 빼앗기기 전 벚꽃이 만개한 '염리초 앞 포장마차 거리' 모습. 사진=서울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서부노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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