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방송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다 용역업체로부터 계약이 일방 종료돼 부당해고를 다퉈온 전직 MD(Master Director·방송운행책임자)가 1심에서 승소했다. 관행적으로 외주화되거나 파견직이 남용된 MD가 파견법상 파견이 금지된 업무임을 확인한 첫 판결로 의미가 적지 않다. 

서울북부지법 민사11부(재판장 김광섭)는 지난 15일 전직 청주방송 MD 정아무개씨(39)가 청주방송을 상대로 낸 고용 의사 표시 소송에서 “청주방송은 정씨에게 고용 의사 표시를 하라”며 정씨의 청주방송 근로자 지위를 인정했다. 계약 종료 후 미지급된 임금, 퇴직금 등을 포함해 총 1억7000여만원 상당의 손해배상도 명했다. 

2013년부터 청주방송에서 일한 정씨는 위탁업체와 매년 근로계약을 해오다 2018년 말 갱신이 일방 종료돼 퇴사했다. 정씨가 ‘MD는 정직원처럼 일하므로 회사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청주방송에 요구한 직후다. 청주방송은 2015년 9월 MD 업무를 한 인력파견 전문업체에 위탁하며 외주화했다. 
(관련 기사 : [이재학PD 보고서 분석] ⑥ 5년 동안 계약서만 70장… 청주방송 ‘제2의 이재학’ 있다)

▲MD가 일하는 주조정실 자료사진. MD 직군은 방송 운행을 책임지는 필수 인력이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력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이 늘어났다.
▲MD가 일하는 주조정실 자료사진. MD 직군은 방송 운행을 책임지는 필수 인력이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력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이 늘어났다.

 

정씨는 이를 불법파견이라고 주장했다. MD 직무는 파견법이 허용하는 파견 대상 업무가 아니라는 주장이 골자다. 파견법은 파견노동 오남용을 방지하는 취지로 파견법이 정한 대상 업무에만 파견노동자를 쓸 수 있게 정했다. 

파견직으로 MD를 시작했던 그는 이후 위탁업체에 고용됐으나 업무 내용과 방식은 그대로였다. 합법적인 업무 위탁일 경우 업체는 독자적인 조직, 기술과 도구를 가지고 위탁 업무를 수행하고, 자율적으로 인사 관리를 한다. 그러나 정씨를 고용한 업체는 인력파견 역할만 했을 뿐 모든 업무 지시·감독 권한은 청주방송에 있었다. 정씨는 이에 청주방송이 자신을 계속 파견노동자로 썼음에도 ‘위탁업체 직원’으로 위장했다며 불법파견을 주장했다.

법원은 정씨 주장을 대부분 들어줬다. 재판부는 “파견법을 적용받는 파견근로자인지 여부는 형식에 구애될 게 아니라, 제3자가 근로자에 구속력 있는 업무 지시를 하는 등 상당한 지휘·명령을 하는지, 제3자 소속 근로자와 한 작업집단으로 직접 공동 작업을 하는 등 3자 사업에 실질 편입됐다고 볼 수 있는지, 원고용주(파견업체)가 노무·근태 관리 권한을 독자적으로 행사하는지 등을 바탕으로 근로 관계 실질을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기준에 따라 △청주방송이 정씨에게 상당한 업무 지휘·명령을 했고 △정씨가 청주방송 직원들과 하나의 작업집단으로, 유기적으로 업무를 수행했으며 △위탁업체가 MD 업무에 투입될 인력의 채용, 교육, 휴가 부여, 근태 점검 등을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정씨가 파견직 운전기사로 일할 때 모습. 2013년 청주방송에 운전기사로 들어온 정씨는 2015년 4월 파견직 MD로 일을 시작해 2018년 12월까지 일했다.
▲정씨가 파견직 운전기사로 일할 때 모습. 2013년 청주방송에 운전기사로 들어온 정씨는 2015년 4월 파견직 MD로 일을 시작해 2018년 12월까지 일했다.

 

재판부는 “정씨는 일일운행표, 송출의뢰서, 카카오톡 등으로 청주방송 편성제작국의 구체적 지시를 받으며 일했고, 정규직 TD(기술감독)와 2인 1조로 일하며 청주방송 직원과 구별되지 않은 데다 청주방송으로부터 전문성 배양을 위한 교육도 받았다”며 “MD 위탁업무는 구체적으로 범위가 한정된 업무로 보기 힘들고, 청주방송 직원의 업무와 구별된다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위탁업체가 MD 업무 수행을 위한 독립적인 조직이나 설비를 갖추고 있지 않다”고도 판시했다. 

청주방송은 “실질적으로 도급 계약으로 청주방송은 정씨에게 도급 업무를 발주하고 수행을 검수한 것에 불과하며, 해당 위탁업체는 현장대리인을 청주방송에 배치해 정씨에게 구체적인 업무 지시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정씨가 파견직일 때와 위탁업체 소속일 때 업무 내용과 방식이 똑같고 청주방송 MD와 동일하게 일했으며 위탁업체의 현장대리인 통해 업무가 이뤄졌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청주방송은 MD가 파견 대상 업종이라며 MD가 파견법상의 ‘영화, 연극 및 방송 관련 전문가’나 ‘광학 및 전자장비 기술 종사자’ 업무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MD는 영화, 연극 등 관련 전문가 업종이라 볼 수 없고, 광학·전자장비 기술 업종에는 해당되나 이 경우 ‘파견은 보조 업무에 한정돼야 한다’는 파견법 조항에 어긋난다”고 기각했다. 나아가 “청주방송은 출산, 질병 등으로 결원이 생긴 때나 일시적으로 인력을 확보해야 할 경우에만 근로자 파견을 받아 MD에 종사케 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MD들이 쓰는 송출용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방영 시간에 맞춰 정규직 기술감독(TD)에게 '스탠바이'와 '큐' 사인을 보낸다.
▲MD들이 쓰는 송출용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방영 시간에 맞춰 정규직 기술감독(TD)에게 '스탠바이'와 '큐' 사인을 보낸다.
▲MD가 업무를 위해 청주방송으로부터 받는 일일 광고 운행의뢰서.
▲MD가 업무를 위해 청주방송으로부터 받는 일일 광고 운행의뢰서.

 

이번 판결은 MD가 파견 허용 업종이 아니라는 점을 법적으로 확인한 첫 판결이다. 방송사들은 MD가 방송 송출을 담당하는 필수 인력임에도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관행적으로 파견직을 남용하거나 외주화했다. 정씨를 대리한 이용우 변호사(법무법인 창조)는 “방송사 MD 업무 대부분이 위장도급이나 파견으로 운영되는데, 이번 판결이 방송사의 불법적 고용을 시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법원은 정씨가 받아야 할 임금을 청주방송의 정규직 MD의 호봉을 기준으로 계산했다. 이 변호사는 “유사 업무를 수행하는 정규직의 호봉표와 단체협약 등을 적용해 노동조건을 차별없이 실질적으로 보장했다”며 “불법 파견 지위로 직접 고용이 지연돼 근속 기간이 단축됐는데, 이에 따른 퇴직금 손해도 손해배상액에 포함시킨 첫 판결”이라고 밝혔다. 

정씨는 청주방송 고 이재학 PD가 부당해고된 뒤 사망할 때까지 그를 조력한 몇 안되는 청주방송 직원이었다. 정씨는 이번 판결에 “선고 당일 목련공원(이재학 PD 봉안당)에서 결과를 기다리며 조마조마했는데 결과를 전달받고 한참을 울었다. 재학이가 너무 그립고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며 “같은 업무를 하는 모든 분들에 희망의 소식을 전할 수 있어 기쁘지만 회사가 항소할 여지가 있어 앞으로가 더 바빠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원회’는 “청주방송은 항소를 포기하고 판결 내용대로 원고를 즉각 복직시켜야 한다. 또 현재 근무 중인 다른 MD들도 즉각 직접 고용해야 한다”며 “전국의 방송사들 또한 이번 판결을 존중해 MD를 포함한 위법·부당한 방송사 비정규직 고용실태를 즉각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청주방송 관계자는 “선고 대로 정씨에게 고용의사를 전달할 방침이다. 당사자 의사를 존중하고 최대한 원만히 처리하겠다는 게 당사의 입장”이라며 “항소는 실익이 있는지, 적정한지 등을 법률대리인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지금은 정씨 의사를 정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오늘 중에라도 의사 확인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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