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송사에서 10년 일했다. 퇴사 전 6년 동안 같은 일을 했다. 정규직이었던 적은 없다. 4년은 파견노동자, 이후 2년은 기간제였다. 이런 사람이 2년 기간제 기간 만료를 눈앞에 뒀다. 정규직 전환(계약 갱신)을 기대하는게 상식에 맞나, 반대가 맞나. 법원은 반대란다.”

10년 몸 담은 회사에서 갑자기 내쳐졌을 때 박기정(43·가명)씨는 39살이었다. 결혼을 한 후였고 당장 다른 일을 시작할 특별한 기술도 없었다. 그의 일은 방송사에만 특화된 업무였다.

그는 ‘MD’였다. 방송사 주조정실에서 방송 송출을 관리하는 인력이다. 시간표대로 각 프로그램과 광고가 방영되도록 기술감독에게 송출 신호를 일일이 보낸다. 방영물 사이 1초의 빈틈만 생겨도 방송사고다. 그런데 광고 교체, 대형 사고 발생 등의 돌발 변수는 언제든 터진다. MD는 송출의 일선에서 이 문제들을 관리한다. 방송사 필수업무다.

▲MD가 일하는 주조정실 자료사진.
▲MD가 일하는 주조정실 자료사진.

 

39살, 10년 일한 방송사에서 하루아침에 ‘방출’

‘해고’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았다. 그는 2016년 7월 TJB대전방송을 나왔다. 회사는 계약 만료 2주 전 ‘같이 못할 것 같다’며 구두로 해고 통보했다. 박씨는 당시 1년짜리 기간제 계약을 1번 갱신해 2년 기간을 거의 채웠다. 기간제법상 2년이 지난 기간제 노동자는 정직원으로 간주된다. 박씨에겐 정규직 전환을 하지 않겠다는 통보이자 해고였던 셈이다.

그는 이미 4년 간 파견직 MD로 일한 바 있다. 파견법상 회사는 2년 넘게 일한 파견노동자를 직접 고용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회사는 4년 후 그를 직접 고용하지 않고 ‘1년 기간제’로 두 번 썼다. 같은 장소에 출근해 똑같은 업무 방식과 내용으로 정규직 TD(기술감독)와 조를 이뤄 일한 햇수만 6년이었다.

억울했다. 스물 아홉부터 서른 아홉까지, TJB에서 10년 동안 박씨는 비정규직으로만 일했다. 의상 분야를 전공했던 그는 2006년 우연한 기회로 TJB 미술·세트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다 보니 4년이나 일했다. 박씨의 성실함을 좋게 본 미술팀 차장이 당시 사람을 뽑던 MD 자리에 그를 추천했다. 2010년 박씨가 MD를 시작한 경위다.

퇴사 직후 억울함에 법원 문을 두드렸지만 “사건이 캐비넷에 잠들어 있는지” 대법원(민사1부)은 3년 넘게 소식이 없다. 2016년 9월 첫 소송 시점부터는 4년 8개월째다. 그는 부당해고 다툼으로 대법원까지 간 MD 첫 사례다. ‘해고가 부당하니 무효’라는 확인을 구한다. 1심에서 승소했으나 2심에서 패소해 2018년 1월 대법원에 상소했다. 사건은 심리 중이다.

▲사진=pixabay.
▲사진=pixabay.

 

“반복 노동에 밤샘” 누군가 꼭 해야하는 일, 비정규직 몫이었다

“한 마디로 빡세요. 기피 업무에요. 반복 노동에 밤샘 교대 근무를 해야 하니 직원들이 하길 꺼리죠. 그런데 필수업무니 누군가는 해야 하고요.” 박씨는 MD가 방송사 내 기피 직종이기에 비정규직이 남용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24시간 주조정실을 지키는 MD는 교대제로 돌아간다. TJB 경우 4조 3교대였다. ‘8시간 주간 근무-15시간 야간 근무 겸 비번-휴무’가 4일 단위로 돌아갔다. 광고·캠페인, 프로그램 등 모든 방영물이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기술감독에게 신호를 줘야 한다. 업무량이 많고 일 특성상 방송사고 발생율도 높다.

이 때문에 한 지역 방송사 MD ㄱ씨는 “한 달 만에 도망간 MD도 봤다”고 말했다. 원래 방송사 운전기사로 일하다가 MD로 전환됐는데, 일이 고돼 한 달 후 잠수를 타고 회사를 나오지 않았다는 것. 서너달 일하다 그만두는 신입 MD도 적지 않았다. ㄱ씨는 “고용이 보장되고 인사 관리도 받는 MD면 길게 버티겠지만, 외주·파견·기간제 비정규직들이지 않느냐”라고도 했다.

파견 MD에게 휴가는 ‘갚는’ 개념이다. 특정일에 휴가를 쓰려면 비번이나 휴무인 MD에게 일을 부탁하고, 그의 휴가에 자신이 대신 일을 해준다. 휴가가 아니라 근무 일을 뒤로 미루는 구조다. 여름이나 겨울 ‘1주일 단위’로 쉬고 싶을 땐 MD 4명이 머리를 맞댄다. 쉴 순서를 정해 나머지 3주 동안 3명씩 격무를 나눠진다. 힘들 땐 “그냥 우리 길게 쉬지 말자”고 합의를 보기도 한다. 박씨도 파견직 4년 동안 “휴가를 갚고” 살았다.

이런 MD의 비정규직 고용은 전국에서 발견된다. 근로감독으로 불법파견이 확인된 곳은 CJB청주방송이다. 파견노동자는 최대 2년까지만 합법으로 쓸 수 있으니, 용역업체에 MD 업무를 위탁해 ‘용역업체 직원’을 쓰는 방식으로 파견법을 우회했다. 이 경우 방송사가 용역업체 직원을 직접 지휘·감독하면 불법이다. 그러나 MD는 방송사에 출근해 방송사 시설을 쓰고, TD와 편성팀 관리자 등 방송사의 직접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한 지역 방송사 MD가 쓰는 프로그램 및 광고 편성표 업무 자료.
▲한 지역 방송사 MD가 쓰는 프로그램 및 광고 편성표 업무 자료.

 

‘위장 도급’ 형태의 불법파견은 청주방송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상파 3사 기준으로 지역 방송사 MD 고용 현황을 조사해 본 적 있는 한 언론계 관계자는 “불법 파견을 하고 있는 방송사는 청주방송 외에도 여러 곳”이라고 귀띔했다.

2년 기간제 동안 박씨는 매월 214만원 가량을 받았다. 여기에 초과 근무 수당이 붙고, 설·추석 명절 때마다 50만원씩 더 받았다. 파견직일 땐 이보다 훨씬 적었다. 매달 급여는 100만원대 중후반대였고 명절엔 비누·샴푸 선물세트를 받았다.

박씨는 격무에 시달리는 필수 업무를 비하하는 시선이 싫었다고 말했다. MD로서의 자부심은 그가 소송에 나선 이유기도 하다. 그는 MD 일이 단순·반복적으로 보여도 방송사고를 내지 않고 업무 효율성을 높이려면 노하우와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MD는 방송 송출에 없으면 안 될 필수직이다. 그는 “MD는 전문성·기술성이 없다며 ‘의상을 전공한 사람도 MD를 한다’는 식으로 말한 2심 재판부와 회사에 화가 났었다”고도 말했다.

1·2심 엇갈린 판결…대법원 3년째 심리만

그는 “2심에서 결과가 뒤집어지는 걸 보고 법이란 게 참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구나 느꼈다”고 말했다. 같은 사실을 앞에 두고도 형식과 실질 중 법원이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박씨는 ‘실질’이 상식이라고 강조했다. 형식에 치우친 2심 재판부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사진=pixabay.
▲사진=pixabay.

 

1심 대전지법(재판장 노행남)은 박씨에게 ‘근로계약 갱신에 대한 정당한 기대권이 존재한다’며 ‘회사의 갱신 거절은 노동관계법이 추구하는 고용안정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밝혔다. 6년 간 같은 일을 한 점, MD가 필수업무인 점, 박씨 외 나머지 기간제 MD는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실을 이유로 들었다. 파견직으로 근무한 지 2년이 넘어가는 시기 회사가 그를 정규직으로 고용하지 않은 점도 회사에 불리하게 해석했다.

2심 대전고법(재판장 이동근)은 “파견직 2년 후 회사에게 직접 고용 의무가 생긴다고 이것이 곧 박씨에게 근로계약 갱신에 대한 신뢰를 준다고 보기 어렵다”고 반대로 선고했다. 계약서에 ‘근로계약은 기간 만료로 자동해지된다’고 적혀 있고, MD는 고도의 전문성이나 특별한 자격을 요하지 않는 업무라는 이유다. TJB가 2년을 초과해 박씨를 계속 파견직으로 썼고 박씨가 여기에 문제제기 하지 않은 점도 계약 갱신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로 삼았다.

회사가 1년 단위 기간제로 박씨를 고용한 것도 1·2심은 정반대로 해석했다. 1심은 “기간제 계약 기간이 2년에서 단 1일이 부족할 뿐”이라며 “기간제법상 기간제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 조항을 회피하는 의도로 보인다”고 밝혔다. 2심은 “계약 기간이 2년을 넘지 않도록 하려는 분명한 의사에서 비롯됐다”고 해석했다.

박씨는 지난 4월 한 MD가 승소한 판례가 반가웠다. 한 청주방송 MD가 ‘자신은 불법파견된 노동자였고 청주방송으로부터 부당해고됐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했다. 재판부는 MD가 파견법이 허용하는 파견 대상 업무가 아니라고 확인했다. 이를 확대하면, 현재 전국의 파견직 MD는 불법 고용된 상태다.

박씨는 대법원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5년 전 소송에 나설 당시, 소송을 지지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방송사를 상대로 비정규직이 소송에 나서 승소하는 사례가 많지 않은 때였다. MD는 특히 공론화된 판례가 없었다. 박씨는 “상식적으로 부당한 해고가 맞으니까, 뭐가 불리한지, 질 게 뻔한지 계산보다 떳떳하니까 그대로 소송을 진행했다”며 “MD들에게 좋은 선례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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