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2018년 수능 날 당시, 나는 수능 시험장에 가는 대신 청계광장에 섰다. 대학에 가는 대신 대학입시거부선언에 참여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나를 상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잠을 줄이고 밥을 줄여가면서 공부하라던 교사의 말을 기억한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자아실현은 교과서 속 말뿐이었고, 현실의 자아는 서서히 말라갔다. 무엇을 위해서? 대학에 가기 위해서. 대학에 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은 곧 대학이 원하는 틀에 자신을 맞춘다는 뜻이고, 대학이라는 수요자의 필요에 맞는 상품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었다. 대학입시, 풀어서 표현하자면 대학에 스스로가 잘 팔릴 수 있도록 상품으로서 자신을 꾸미는 일이 학생의 지상과제로 여겨졌다. 교육현장에 정작 ‘나’는 없었다. 상품가치로 줄 세워진, 얼룩덜룩 꾸며진 존재만 있었다. 자아는 교환가치의 제고를 위한 도구일 뿐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그런 현실에서, 사람을 상품으로 만드는 교육과 사회를 온몸으로 지적하고 싶었다. 삶을 대하는 뚜렷한 주관까지는 없더라도, 적어도 하루를 살더라도 상품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고 싶은 소망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자신이 대학에 ‘팔릴’ 수 있는 존재인지 궁리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미처 내지 못한 목소리를 대신 내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입시거부를 했다.

대학에 가지 않고 보니 살기가 참 팍팍했다. 아르바이트만 6번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겨우 어느 콜센터에 들어가서 하도급 노동자로 일했다. 일은 고됐다. 100건 가까이 되는 상담을 하루 동안 겨우 쳐내야 했고, 그 가운데 99번 잘해도 1번 실수하면 눈총을 받곤 했다. 화장실에 자주 가지 못해 전립선 건강이 나빠졌다. 특히 상담을 하면서 잘못하지 않아도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용에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사과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럴 때마다 감정노동이 다 이렇지 뭐, 하고 넘겼다.

그러다 하루는 콜센터 휴게실에서 끼니로 김밥을 먹는데, 창밖에 다른 사무실들이 보였다. 콜센터가 위치한 곳은 서초동 한가운데여서, 인근에 법무법인 사무실이 많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로 앞 건물도 법무법인 사무실이 늘어선 건물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아래 주차돼있는 외제차도 즐비했다. 그러려니 하고 김밥을 씹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은 얼마를 받을까. 기껏해야 최저임금 조금 넘게 받는 나는 만져본 적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을 벌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조금씩 우울해지다 이내 서러워졌다.

▲시민단체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이 2019년 11월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2019 대학입시거부선언을 발표했다. 사진=민중의소리
▲시민단체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이 2019년 11월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2019 대학입시거부선언을 발표했다. 사진=민중의소리

 

어디선가 사람의 가치는 분명 같다고 배웠는데. 사람이 가치가 다 같다는 건 말뿐이고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않구나. 사람마다 가치를 다르게 치는구나. 소위 ‘못 배운 사람’과 ‘배운 사람’에게 돌아가는 몫은 전혀 같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노동자가 태반이었던 내가 다닌 콜센터와, ‘많이 배운’ 이들이 일하고 있을 창밖 법조타운은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이 있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학력에 따른 임금 차별의 현실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학력이 낮은 노동자는 더 적게 벌고, 더 많이 일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2019년 고용형태별근로시간 실태조사보고서를 살펴보면, 중졸 이하와 고졸 학력의 노동자는 각각 휴일에 평균 2.9시간, 3.2시간씩 일하고 있는 반면에, 대졸과 대학원졸 노동자는 각각 1.3시간, 0.8시간씩 일하고 있다.

그에 비해 월 평균 소득은 중졸 이하 노동자가 191만원, 고졸 246만원인데 반해 대졸은 387만원, 대학원졸은 551만원이다. 학력이 낮은 사람의 노동은 가치가 낮은 것으로, 학력이 높은 사람의 노동은 가치가 높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호도하지 말자. 돈이 곧 그 사람의 가치가 아니라고, 돈은 단지 숫자에 불과하고 돈으로 샐 수 없는 사람마다의 가치가 내재돼있다고, 그러니 임금격차는 사람의 가치와는 상관없다고. 그런 호도는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만약 돈으로 환원할 수 없는 내재된 가치란 게 사람에게 있다면, 왜 가치 있는 이들이 이토록 천지차이의 액수로 노동의 가치를 다르게 평가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11월1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사거리에서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회원들이 대학 입시 거부 선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11월1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사거리에서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회원들이 대학 입시 거부 선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더 배워서 더 많이 버는 거지, 그게 공정한 거지’라고 할 이들에게 말한다. 배움의 환경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부모의 소득과 학력이 높을수록 대학 진학률과 이른바 ‘명문대’에 진학하는 비율이 높은 현실에서, 학력에 따라 일자리의 질이 달라진다면 그것을 과연 공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공정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세습이고, 더 교묘한 형태의 계층 대물림이다.

배움을 준거로 삼아 사람의 가치에 차등을 둘 때 발생하는 폐해는 또 어떠한가. 우리는 배움을 측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측정을 위해 배우고 있다. 학교 교육이 ‘더 높은’ 대학을 가기 위한 장치로 전락해버린 현실에서, 교육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학교는 단지 대학이 보기에 더 좋은 학생을 만드는 데 집중한다. 이어서 대학은 자본이 보기에 더 좋은 학생을 만드는 데 역량을 쏟는다.

지금 우리는 배우는 사람을 위한 교육이 아닌, 우리를 선발하고 가름하는 이들, 즉 대학과 자본을 위해 교육받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이 보기에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고 상품이고, ‘가방끈 짧은’ 노동자는 품질 나쁜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조건에서 학생들은 대학에, 자본에 자신을 높은 값으로 팔기 위해, 스스로를 값나가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이 싫어서, 나는 대학에, 자본에 자신을 팔고 싶지 않아서 대학거부를 했다. 그랬더니 나에게 무엇이 돌아왔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이 돌아왔다. 나더러 낙오자라고, 저질 상품이라고 부르는 사회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청년세대가 공정을 요구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공정한 경쟁의 기회란 더 좋은 상품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버려지는 것도 받아들일 것을 강제하는 허울에 불과하다. 공정한 경쟁을 말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대우받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사진=pixabay.
▲사진=pixabay.

 

《아함경》에는 붓다와 비둘기, 그리고 매의 이야기가 나온다. 매가 비둘기를 잡아먹으려 하자 붓다는 매에게 비둘기를 먹지 말고 대신 같은 무게만큼 자신의 허벅지살을 먹으라며 칼로 베어준다. 그리고 저울 한편에 비둘기를, 다른 한편에 자신의 허벅지살을 올려놓는다. 그러나 저울은 비둘기 쪽으로 계속 기울었다. 살을 아무리 더 베어 올려놓아도 마찬가지였다. 끝내 붓다 자신이 온몸을 저울에 올렸다. 그때서야 비로소 저울은 균형을 이뤘다. 결국 모든 존재의 무게는 같다는 것이다.

‘공정’의 사전적 정의는 ‘공평하고 올바름’이다. 사람을 상품으로 만들고 상품가치로 줄 세우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과연 ‘공평하고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모든 존재의 무게가 같다며 스스로 저울에 올라간 붓다의 행동이 공평하고 올바르지 않은가. 존재의 무게가 같다면, 어떻게 존재의 허울에 불과한 어느 대학 나왔느냐, 대학은 나왔느냐를 근거로 존엄한 존재들을 차별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는가.

더욱이, 나는 청년세대로서, 그리고 대학 비진학자로서, 존엄한 존재를 상품화하는 공정이라는 이름의 차별 대신, 진정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의미에서의 공정을 원한다. 그것은 공정이라기보다 평등에 가깝다. 평등이란 결국 모든 사람의 가치가 같다는 합의점에서 시작된다. ‘못 배운 자들’의 정치는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연재 순서>
① 우리는 왜 세대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하는가-김건수 (청년학생 시국선언 집행위원)
② 청년비정규직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시장의 불공정, 불평등-김태훈(한국지엠비정규직 청년노동자)
③ 능력주의는 장애인차별에 왜 무력한가-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센터 청년장애인)
④ 학력주의에 기반 한 공정담론이 청년의 이해를 대변 못하는 이유-김정래 (투명가방끈)
⑤ 공정담론은 여성의 안전한 삶과 평등한 일자리에 대안이 되지 못 하는가-안지완 (인천대 페미니즘 학생모임 젠장)
⑥ 공정이 아니라 불평등에 대한 싸움을 벌여야 할 때-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⑦ 정상성을 기준으로 한 능력주의는 차별을 막기 어렵다-한빛 (청소년트랜스젠더인권모임 튤립연대)
⑧ 시대의 위기를 바꾸기 위해 정치를 바꿔야-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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