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처음으로 이스라엘 공식 격투술 크레브마가 수업을 등록했다. 셀프 디펜스(자기방어)에 대한 필요성을 처음으로 절감해서였다. 거리에서만이 아니라 집에서마저도 살인을 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던 순간이었다. 생존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이 물음은 5년 전 했던 질문과 같았다. 2016년, 나의 일상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음을 강남역에서 목도했을 때 나는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는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침묵했던 현실에 맞서 싸우는 우리들이, 투쟁의 주체들이 있었다.

5년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위에서 함께 싸우던 동지들이 많이 떠났다는 것이다. 숱한 조직 내 성차별적인 문화와 일상적 성폭력으로 활동을 그만둔 여성들. 생계가 불안정한 여성들. 실로 페미니즘은 오래된 성차별적 사회와 구조를 바꾸는 운동이었기에 마치 허공에 고함을 치듯,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지칠 때가 많았다. 용기를 낸 여성들이 제 살 깎아가며 이어가는 운동, 증언과 용기 있는 고백이 이어지지만 미비한 정책과 바뀌지 않는 현실, 생색내는 정부와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언론 사이에서 여성 동지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서울여성회에서 마련한 '강남역 살인사건' 5주기 온라인 추모 공간. 사진=서울여성회
▲서울여성회에서 마련한 '강남역 살인사건' 5주기 온라인 추모 공간. 사진=서울여성회

 

거대양당 목소리에 지워진 여성의 삶

페미니즘 이전의 삶은 거대한 양자택일의 연속 같았다. 살거나 죽거나. 버티거나 떠나거나. 다른 선택지를 찾기 위해, 혹은 만들기 위해 거리로 나왔지만 현실은 여전히 객관식이었다. 보수냐 진보냐. 국민의 힘이냐 더불어 민주냐. 납작하고 단순한 삶의 일축 속에 현실 속 여성의 삶은 지워졌다. 맹목적인 지지들 속에서 정치적 대안은 없었고 촛불 이전 뿌리 깊게 자리 잡았던 정치적 대리주의와 대기주의가 다시 사회를 잠식해나갔다. 안타까워하면서도 선심 쓰듯 던져주는 일회성 정책들은 없느니만 못한 경우가 많았다.

생색내는 여당과 탓하는 야당 사이에서 여성들은 무작위로 소비됐다. 언론은 폭력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어떤 피해들이 있었는지에 집중했다. 한 기자는 올해 여성의 날 코로나 시기 급증한 20대 여성의 자살률을 발언한 나에게 “혹시 주변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우울했는지”를 물었다. 몇 명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을까?

정말 궁금해야 할 것은 이런 것들이다. 왜 15년 이후 여성 대상 폭행은 꾸준히 상승세인지, 데이트 폭력 신고 수는 왜 17년 이후 41%나 증가했으며 N번방 가해자 처벌과 재발방지 대책은 무엇일지, 왜 20대 여성들이 자살률이 급증했는지, 권력형 성폭력의 공동체적 해결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지, 왜 여전히 여성 임금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은 60% 대이며 45%는 비정규직인지, 돌봄·가사 노동은 왜 저평가되고 여성화되는지.

보궐선거 이후 청와대가 뒤늦게 청년 TF팀을 발족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여성은 없었다. 물론 청년도 없었다. 공정한 경쟁을 추구한다는 파편화된 청년들과 기회주의적이고도 개인주의적인 청년들의 표상이 상정돼 있을 뿐이었다. 상정된 이미지 속 청년들은 공정한 기회를 사회적 평등이라 여기며 오로지 돈과 이윤 때문에 행동했다.

▲20대 여성들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에 대한 여성혐오 범죄 인정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20대 여성들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에 대한 여성혐오 범죄 인정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공정이라는 이름의 백래쉬

공정성은 수치화가 편하다. 명확히 보이니 근거로 사용하기도 쉽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소위 “객관적 데이터”로도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 절차적 평등마저도 이 모양인데 실질적 평등의 목표까지는 아직 먼 이야기이다. 가부장제 속 여성의 재생산이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받고 착취당하는 건 기존 체제 순응자에겐 당연한 것이다.

남성들은 여성이 경쟁 속에서 남성보다 우위를 차지한다는 주장의 원인을 “특혜”에서 찾는다. 불평등한 사회적 맥락은 절개한다. 애초에 여성들은 특혜 없인 남성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우월적 사고도 엿볼 수 있다. 이는 명백하게 공정성의 이름을 한 백래쉬다. 여성주의적 맥락에서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백래쉬 기본 전제는 여성이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혐오에 기반한다. 여성의 재생산권 무가치화, 성적 착취는 남성들이 요구하는 공정성에서 자연스레 제외된다. 즉 가부장적 질서는 성적 착취를 그대로 용인한다는 말이다. 더 정확히는 그들의 공정성이 곧 가부장적 질서이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길 반대한다. 그리하여 여성들에게 가부장적 질서를 재편하는 것은 곧 차별의 잣대가 되어 온 형평과 공정의 근거를 전복하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묻고 싶다. 당신은 정말 성평등을 반대하는 공정성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

<연재 순서>
① 우리는 왜 세대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하는가-김건수 (청년학생 시국선언 집행위원)
② 청년비정규직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시장의 불공정, 불평등-김태훈(한국지엠비정규직 청년노동자)
③ 능력주의는 장애인차별에 왜 무력한가-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센터 청년장애인)
④ 학력주의에 기반 한 공정담론이 청년의 이해를 대변 못하는 이유-김정래 (투명가방끈)
⑤ 공정담론은 여성의 안전한 삶과 평등한 일자리에 대안이 되지 못 하는가-안지완 (인천대 페미니즘 학생모임 젠장)
⑥ 공정이 아니라 불평등에 대한 싸움을 벌여야 할 때-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⑦ 정상성을 기준으로 한 능력주의는 차별을 막기 어렵다-한빛 (청소년트랜스젠더인권모임 튤립연대)
⑧ 시대의 위기를 바꾸기 위해 정치를 바꿔야-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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