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기치로 만들어진 청와대 국민청원이 언제부턴가 언론의 유용한 받아쓰기 재료가 되고 있다. 갈등·선정성에 치우친 청원 게시판 인용 보도가 공론장을 왜곡할 우려가 이어지고 있다.

언론의 국민청원 인용 보도는 청원글이 공개된 시점부터, 동의 규모 및 증가세, 청원에 대한 답변 여부 및 반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청와대는 최소 100명 동의로 공개한 청원 중 20만 이상 동의(공개일로부터 30일)를 얻은 청원에 답하고 있으나, 이와 관계 없이 전 과정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미디어오늘은 청와대가 국민청원제도를 시행한 2017년 8월19일부터 올해 5월20일까지 실제 답변이 이뤄진 청원들이 기사화된 양을 살펴봤다. 청원 데이터는 지난달 24일 청와대가 정보공개청구에 응해 제공한 자료를 기준으로 했다. 보도량은 포털 ‘다음’을 기준으로 청원 제목 및 ‘국민청원’ 키워드와 일치하는 뉴스 검색 결과를 산정했다.

해당 기간 답변 요건을 갖춘 국민청원은 총 239건(5월20일 기준, 8건 답변 대기)이다. 전체 청원 100만6376건 중 공개된 3만976건 가운데 20만 명 이상 동의를 얻은 수다. 답변이 이뤄진 청원 중에서는 인권·성 평등 분야가 58건으로 가장 많았고, 정치개혁 33건, 안전환경 31건, 문화·예술·체육·언론 20건, 육아·교육 16건, 보건복지 14건, 반려동물 9건 등 순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을 탄핵하라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을 인용한 보도들
▲문재인 대통령을 탄핵하라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을 인용한 보도들

언론의 시선은 모든 청원에 균등하게 닿지 않았다. 청원 1건당 보도량 분포는 100건 미만이 60.3%(144건)로 가장 많고, 101~300건이 30.2%(72건)로 뒤를 이었다. 301건~500건 미만은 4.2%(10건), 501건~900건 미만이 2.1%(5건), 901건부터 1000건을 초과하는 경우는 전체 3.3%인 8건으로 나타났다. 요컨대 전체 청원의 90% 이상은 1건당 기사가 300건에 못 미쳤다는 의미다. 청원 건수당 보도량 평균은 약 179건 수준이다.

정치 세력간 대결구도에 놓인 청원의 보도량은 평균을 훌쩍 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문재인 대통령’ 관련 청원들이다. 지난 2019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의 탄핵을 청원합니다” 청원은 3310건으로 최다 보도량을 기록했다. 청원보다는 응원의 성격이 강했던 “문재인 대통령님께 청원합니다”(1720건), “문재인 대통령님을 응원합니다”(832건) 등의 청원에도 언론 관심이 집중됐다.

대통령 탄핵 청원은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많은 언론이 다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밖에도 여야가 대항전을 벌인 성격의 청원이 보도량 최상위권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언론이 정쟁화된 이슈에 집중하는 경향이 드러난다. 2019년 가장 많은 동의를 받은 “자유한국당 정당해산 청원”은 2500건, 이에 맞서는 성격의 “더불어민주당 해산 청구” 청원은 752건가량 보도됐다.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과 관련해 해임청원(608건) 및 탄핵(516건)을 요구하는 청원도 언론에 부각됐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경우 “청와대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임명을 반드시 해주십시오”(265건) 및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법무장관 임명을 반대합니다”(275건) 청원이 비슷한 수준으로 보도됐다. 야권에선 국민의힘 지도부 출신의 김무성·나경원 전 의원 관련 청원이 1건씩 있었지만 보도량이 100건 미만이었다.

언론은 코로나19 관련 청원 중에서도 갈등구도가 뚜렷한 사안을 위주로 기사화했다. 코로나 관련 청원 12건 중 가장 보도가 많이 된 사안은 “국시 접수 취소한 의대생들에 대한 재접수 등 추후 구제를 반대합니다”(338건) 청원이었다. “코로나전쟁에 왜 자영업자만 일방적 총알받이가 되나요? 대출원리금 임대료 같이 멈춰야 합니다”(52건), “코로나 시대, 실내체육시설도 제한적, 유동적 운영이 필요합니다”(101건)처럼 자영업자들의 고충을 전한 청원은 오히려 뒤로 밀렸다.

성범죄 관련 청원의 경우 전 국민적 공분을 샀던 사건을 중심으로 보도가 집중됐다. 2건의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은 정치 분야 이슈를 제외하고 거의 유일하게 2000건 넘는 보도량을 기록했다.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945건) 등 ‘텔레그램 성착취(n번방) 사건’ 관련 청원도 기사량이 많았다.

반면 성범죄 관련 제도를 개선해달라는 청원은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다. 조두순 사건과 관련해 “주취감형(술을 먹으면 형벌 감형) 폐지를 건의(청원)합니다”라는 청원을 다룬 기사는 99건에 그쳤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 특별조사팀을 서지현 검사를 필두로 한 여성 조사팀으로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청원은 15건, “성범죄피해자의 집 주소와 주민번호를 가해자에게 보내는 법원을 막아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은 26건 보도됐다.

언론·미디어의 문제를 꼬집는 청원도 활발하게 보도되지 않았다. 관련 청원 14건의 평균 보도 건수는 약 115건, 그 이상 보도된 청원은 “TV조선의 종편 허가 취소 청원”(212건), “역사왜곡 동북공정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즉각 방영중지”(189건), “김어준 편파 정치방송인 교통방송에서 퇴출”(185건), “고 김성재님의 사망 미스테리를 다룬 그것이 알고싶다 방영”(168건), “KBS수신료 전기요금 분리징수 청원”(162건),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의 공적 책임 방기하고 언론이기를 포기한 채널A와 TV조선의 재승인을 취소하라”(149건) 순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일러스트 이미지 ⓒ연합뉴스
▲청와대 국민청원 일러스트 이미지 ⓒ연합뉴스

언론 전반에 대한 불신을 개선하라는 청원을 다룬 기사는 두 자리수에 그쳤다. “언론사 가짜뉴스의 강력한 처벌을 청원합니다”라는 청원은 74건, “전 언론의 세무조사를 명령한다”는 청원은 82건, “병폐의 고리, 검찰 기자단을 해체시켜주십시오”라는 청원은 72건 보도에 그쳤다. 가장 적게 보도된 청원은 “일본 극우 여론전에 이용되고 있는 가짜뉴스 근원지 조선일보 폐간 및 TV조선 설립허가취소”(35건)로 나타났다. 쟁점화하기 수월한 청원에 집중하면서, 언론 스스로 신중하게 고민하고 자성해야 할 청원은 뒤로 미뤄뒀다는 지적이 가능한 대목이다.

답변 요건을 충족하지 않은 청원의 경우 ‘입맛대로 취사 선택’이 노골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포털에서 유통될만한 ‘기사감’으로 판단하면 일단 쓰고 보는 행태의 결과다. 지난해 3월 “25개월 딸이 초등학생 5학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청원의 경우 수많은 언론에 의해 다뤄지면서 동의 수 증가 추이까지 ‘속보’처럼 전해졌다. 그러나 결국 ‘허위사실’로 드러나면서 무분별한 인용 보도의 위험성을 시사했다.

갈등이 첨예한 사안을 무책임하게 쓰는 행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월 “여성 징병 대신에 소년병 징집을 검토해 주십시오” 청원이 일례다. 관련 보도가 이어지자 소위 ‘여초 커뮤니티’를 향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는데, ‘남초’로 분류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의도적으로 ‘소년징병 대 여성징병 프레임’을 의도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진실 공방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당시 동의 인원이 4000명대에 불과했던 청원을 논쟁에 붙인 당사자가 언론이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언론이 입맛에 맞는 청원을 골라 ‘국민 여론’으로 규정하는 방식은 “여론조작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민언련 분석에 따르면 2019년 청와대 청원 182건 중 100명 이하 동의를 얻은 청원을 보도한 비율이 20.3%, 답변 요건인 20만명을 채우지 못한 청원 기사는 30.2%, 20만명 이상은 49.4%로 집계됐다. 부동산, 노동 등 정책과 관련해 상반된 청원들 중에서 자사 논조에 맞춰 선택적으로 다루는 경향도 확인됐다.

지난 1월 한국방송학보에 게재된 논문(청와대 국민청원의 속성과 이용자 관여, 언론보도의 관계)에 따르면 언론은 주로 청원 게시 바로 다음날 오전까지의 동의 수 증가율을 살펴 보도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청원에 나타난 갈등이 미칠 실제 영향보다 이해당사자간 대립하는 정도가 동의 여부로 이어진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런 환경에서 “인위적으로 주목을 받은 청원이슈가 언론 보도를 거쳐 보다 큰 규모의 공중에게 확산함으로써 왜곡된 여론을 형성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지적이다.

연구에 참여한 이재국 성균관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인용한 보도에도 일반적인 저널리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미디어오늘에 “따분하게 들리기 쉽지만 진실 보도, 사회 전체 이익을 고려하는 보도가 제일 중요하다. 갈등을 유발하고 감정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선정적인 보도는 지양해야 한다”며 검증을 삭제한 행태를 비판했다. 이어 “청원을 올리는 개별 국민이 제도를 바꿔달라는 주장을 정리된 상태로 표현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 정리된 요구를 할 수 있는 게 언론”이라며 “청원이 올라오면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분석하고, 제도적 해결을 촉구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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