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출간된 ‘정두언, 못다 이룬 꿈’은 정치인 정두언의 미공개 육필 원고를 담은 책이다. 2019년 7월 스스로 세상을 떠난 그의 2주기에 맞춰 출판됐다.

그와 가까웠던 소종섭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이 공개되지 않았던 정 의원 원고를 엮어 책 한 권을 만들었다.

책에는 정 의원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 모습이 주로 담겼다. 2002년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 당선을 돕고 서울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되는 순간, 그의 펜이 멈춘다.

소종섭 전 국장은 “정두언 자신이 직접 쓴 이 초고는 정치인 정두언의 삶과 정치적 비전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여물어가게 됐는지를 다소 거칠지만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값지다”고 평가했다.

▲ 지난 15일 출간된 ‘정두언, 못다 이룬 꿈’/정두언 외 쓰고, 소종섭 엮음/블루이북스미디어/
▲ 지난 15일 출간된 ‘정두언, 못다 이룬 꿈’/정두언 외 쓰고, 소종섭 엮음/블루이북스미디어/

1980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정 의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장관으로 있던 정무2장관실, 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등을 거쳤다. “정통 공무원의 길이 아닌, 비정통(?) 공무원의 길”만 걸었다고 자조한 이유다.

그 시절 에피소드 가운데 김영삼 정부 국무총리로 발탁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이야기가 새롭다. 정 의원은 그때 국무총리 정무비서실의 서기관급 비서관이었다.

정 의원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를 얘기하면, 이회창 총리는 대통령 주변에서 자신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내심 상당히 민감해져 있었다”며 “그중 하나로 자신의 통화가 도청 당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법관이던 이 전 총재를 1993년 감사원장에 임명했다. 이 전 총재는 국방부의 율곡사업, 평화의 댐 건설 등에 감사원 메스를 들이대며 대국민 지지를 얻었다. 그해 연말 국무총리에 오르지만 YS와 수시로 충돌했다. 총리에 부여된 법적 권한을 적극 활용하며 소위 ‘얼굴마담 총리’를 거부한 것이다.

정 의원에 따르면, 당시 이회창 총리는 자신에 대한 전화 도청이 아니면 도저히 파악 불가능한 내용이 정보기관 보고서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도청 사실을 확신하게 됐다.

이 총리는 해당 간부에게 “불법적인 도청을 하는 곳이 어디인지 확인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연구소 이름을 빙자해 도청기관을 만들었고 이곳에서 도청이 이뤄지고 있다는 확인 보고가 올라왔다. 보고를 받은 직후 이 총리는 해당 기관을 없애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정 의원은 “당시 비서실에서는 이 총리의 엄명에 따라 정말 울며 겨자 먹기로 (불법기관을 폐쇄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만들긴 했지만, 과연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이러다가 무슨 일이 나는 건 아닌지 모두 전전긍긍했던 것 같다”며 “그러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 문제가 갑자기 불거져 돌연 총리 사퇴라는 사태가 발생해버린 것”이라고 전했다.

국무총리가 정부의 불법도청을 스스로 인정하고 도청기관 자체를 폐쇄하라고 지시한 것은 사실상 퇴로를 끊고 최고권력에 맞서는 일에 가깝다. 정 의원은 ‘대쪽 총리’ 행보에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해야 하나 겁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 당시의 이회창은 그런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사실 이때가 이회창의 인생에서 절정기가 아니었을까. 절정기라는 개념이나 기준이 좀 막연하긴 하지만, 한 인간의 장점과 강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빛이 난 시기라고 한다면 그렇다는 얘기”라고 덧붙였다.

이 전 총재에 대한 정 의원의 생전 평가는 다소 박했다. 정 의원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회창은 훌륭한 인물임에 틀림없으나,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정치판에 들어와서 개인적으로 실패했을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을 봤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회창이 법조인으로 남아서 대법원장이 됐다면 아마 그는 사법부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데도 큰 족적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면에서 그는 대권에 눈이 멀어 그러한 자신의 역사적 책무를 방기한 죄가 있다고 본다.”(P. 87)

▲ 지난 27일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가 부산 자갈치시장을 방문한 모습. 사진=윤석열 캠프
▲ 지난 27일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가 부산 자갈치시장을 방문한 모습. 사진=윤석열 캠프

문득 야권 대선주자로 떠오른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정치 행보를 정 의원이 어떻게 평가했을지 궁금해진다.

정 의원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해 “지금 전체 대한민국 검사 중에서 검찰총장감을 꼽으라면 윤석열 만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여야를 떠나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검찰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권에 “지금 권력도 윤석열 총장이 임명되면 굉장히 긴장해야 할 것이다. ‘걸리면 죽는다’다.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정 의원 말대로 윤 전 총장은 그해 8월 ‘조국 사태’에서 정권 실세였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를 수사했다. 자녀 입시 비리와 사모펀드 투자 관련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 전 장관 배우자 정경심 교수는 지난해 12월 1심에서 유죄를 선고 받고 법정 구속됐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현재 영어의 몸이 된 것도 윤석열 사단의 수사 성과다.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날카로운 사정의 칼을 보여준 윤 전 총장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정권교체’를 기치로 내걸고 야당 정치인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대선주자로서 미래 비전과 어젠다보다 ‘반(反)문재인’을 외치느라 목 주변 힘줄만 불거졌다.

청와대와 여권이 이들을 자리에서 내쫓으려 했다지만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요구하는 전직 사정기관장들의 권력쟁투는 아무래도 볼썽사납다. 정 의원은 책에 이렇게 기록했다.

“권력은 이회창 같은 자기 분야의 훌륭한 인물들을 끌어들여 망가뜨리고, 역사에 기여할 기회를 쓸어가 버리는 하수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 물론 정 의원이 살아있다면 문재인 정권과 여당에는 더 살벌한 독설을 쏟아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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