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알고있지만,’에서 주연 커플 만큼이나 인기를 얻은 ‘솔지완’(윤솔·지완)이 있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우정을 이어오다 연인이 된 여성 커플이다.

드라마 중반까지 둘은 서로에게 다가가는 남성이 등장할 때마다 질투를 느끼지만 어떤 감정인지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 눈물을 흘리며 솔에게 고백한 지완(윤서아)은 다음날 ‘기억나지 않는다’며 솔(이호정)을 피하고, 결국 솔이 “좋아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기에 이른다.

이후 익숙한 전개는 두 인물이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애써 부인하거나, 주변인과 갈등을 겪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완의 진짜 고민은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것이 아닌, “인생의 반이나 마찬가지”인 솔과 섣불리 연애를 했다 헤어지면 친구를 잃을 수 있다는 걱정이었다.

주변 인물들도 아무런 차별 없이 이들을 대했다. 둘의 친구이자 주인공인 나비는 지완과 연애를 시작한 솔에게 “좋아 보인다”며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다. 여러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솔·지완은 자연스럽게 애정을 과시한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부여되는 서사 없이 청춘로맨스물의 연인들 중 하나로 등장했을 뿐이다.

▲드라마 '알고있지만,'에서 윤솔, 서지완 커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장면. 사진=JTBC드라마 페이스북
▲드라마 '알고있지만,'에서 윤솔, 서지완 커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장면. 사진=JTBC드라마 페이스북

지난 6월 종영한 tvN 드라마 ‘마인’에서도 정서현(김서형)의 커밍아웃을 마주한 배우자 한진호(박혁권)가 “불륜은 아니란 소리네, 남자가 있다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다”라며 담담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정서현과 대립각을 세우던 극중 인물이 그의 성정체성을 폭로하겠다며 협박하는 장면이 몇 있었지만, 대부분의 인물이 정서현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 밖에도 지난해 JTBC 드라마 중 ‘안녕 드라큘라’에선 레즈비언 안나(서현), ‘이태원 클라쓰’에선 트랜스젠더 마현이(이주영)가 사회적 편견에 맞섰다. 지난 5월 공개된 카카오TV 오리지널 ‘이 구역의 미친X’에선 사회적으로 다른 성별의 옷을 입는 크로스드레서 이상엽(안우연)이 등장했다.

성소수자나 커밍아웃을 자연스럽게 그리는 장면은 과거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어려웠다. 주창윤 서울여대 교수는 2003년 한국 TV드라마가 동성애를 다루는 방식이 △사회제도와 공존할 수 없는 비극적 사랑 △사적 공간에 가두려는 설정 △동성애자임을 감추기 위한 양성애자와의 결혼과 파국 등으로 제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0년대 초반 MBC ‘커피프린스 1호점’(2007년) 류의 드라마, ‘쌍화점’(2008년) 류의 영화에 활용된 소위 ‘동성애 코드’는 성애 중심의 수단으로 활용됐다.

▲tvN드라마 '마인'의 한 장면. 사진=유튜브 디글 채널
▲tvN드라마 '마인'의 한 장면. 사진=유튜브 '디글' 갈무리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는 “1990년대 처음 커밍아웃을 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아무렇지 않았다. 결혼식도 함께 가고 애인끼리도 만난 경험이 실제로 있었는데 드라마에선 오히려 반영되지 않는 상황이었다”며 “쫒겨나고 관계가 끊어지는 것 또한 현실이지만 그 현실만을 보여줬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10년 태섭(송창의)·경수(이상우) 커플이 등장한 SBS ‘인생은 아름다워’는 성소수자가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지상파 첫 사례로 평가받는다. 당시 조선일보에 SBS를 비난하는 광고가 실리는 등 성소수자 혐오 세력의 반발이 거셌으나 드라마는 20% 중반까지 시청률을 올리며 순항했다. 당시 이 드라마는 성소수자 커플을 이성애자 커플과 동등한 수준으로 다룬 의미가 깊은 동시에 가족에 의해 갈등이 해소됐다는 한계도 지적됐다. 이후 지난해 tvN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등에서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했고, 올해 갈등 구도에서 벗어난 성소수자의 존재가 그려지기에 이르렀다.

드라마가 그리는 성소수자 모습은 실제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채윤 활동가는 “드라마 속 인물들이 성소수자를 괴롭히는 걸 본 사람들은 이런 괴롭힘이 정상 범위라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나 역시 저렇게 할 수 있다는 상상력이 더 넓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 일본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한 계기는 트랜스젠더 주연이나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꼽힌다는 것이다.

황진미 문화평론가도 “요즘은 극중에서 ‘깜짝쇼’하듯 (커밍아웃을) 촌스럽게 재현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성소수자를 그리는 방식도 이성애자 관점의 대상화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다는 평가다. 황 평론가는 2004년 영화 ‘주홍글씨’에서 갈등을 빚던 여성 인물들의 성애가 남성적 관점에서 연출된 사례와 관련해 “과거 레즈비언은 이성애자 남성의 상상에서 성애화된 상태로 재현됐다”고 짚었다.

미디어 속 성소수자들이 스테레오타입(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배경으로 플랫폼의 다양화가 꼽힌다. 오소리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상임활동가는 “성소수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생겨난 건 방송인 몇 명이 성소수자를 대표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1인 미디어를 통해 성소수자들 개인이 본인을 소재로 한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며 “그만큼 다양한 성소수자들의 모습이 담기면서 자연스럽게 스테레오타입이 벗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2010년 방영된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홍보 이미지. 사진=SBS 홈페이지
▲2010년 방영된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홍보 이미지. 사진=SBS 홈페이지

황진미 평론가 역시 “지금은 SNS, 유튜브 등을 통한 모임이 굉장히 소수화될 수 있는 환경이다. 이전에는 소수자적 이야기를 할 터전이 없었다”며 “이런 모임에선 주류든 비주류든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다. 차라리 소수자에게 열린 장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같이 했다.

페미니즘 요소가 드라마에 반영되듯 사회 구성원이 공감하는 가치가 자연스럽게 반영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황 평론가는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젊은 참가자들이 나와 여성·여성, 남성·남성 커플 구도를 이루기도 하지 않느냐”며 “사회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지금도 언제든 성소수자의 존재가 삭제될 수 있는 환경이다. 지난 3월 SBS가 성소수자였던 프레디 머큐리와 밴드 ‘퀸’을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동성간 키스신을 삭제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2015년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JTBC ‘선암여고 탐정단’에서 여고생간 키스 장면 등이 “부적절”하고 “사회 통념에 반한다”며 법정제재인 경고 조치를 의결했다.

오소리 활동가는 “이처럼 성소수자가 아예 삭제되거나 등장 자체가 희귀한 상황에서 성소수자 캐릭터성이나 스테레오타입을 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며 “방송에 더 많은 성소수자의 등장이 필요해보인다”고 밝혔다.

실제 한국 드라마에서 이성애자로 등장하는 인물에 비해 성소수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주연급의 캐릭터로 등장한 경우는 더욱 적다. 그나마 최근 호평을 받은 드라마 가운데 지상파 콘텐츠는 전무하다. 지상파 방송사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수자 존재에 여전히 눈 감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채윤 활동가는 2005년 MBC 드라마 ‘떨리는 가슴’에 트랜스젠더 하리수씨가 출연한 사례를 떠올렸다. 하씨는 30대가 되어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 혜은 역을 맡아 가족과 갈등을 겪고 끝내 화해하는 이야기를 연기했다. 오히려 최근에는 이런 작품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한 활동가는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는 어떤 식으로든 더 다뤄져야 한다. 주인공, 부주인공, 교사, 우체부 등 다양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양’이 늘어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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