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아침은 오전 3시에 시작한다. 운판, 목어, 법고, 범종 등 사물로 그 시작을 알린다. 하늘을 나는 새를 깨우는 운판, 물에 사는 짐승을 깨우는 목어(휴대용 목어가 우리가 아는 목탁이다), 가축과 짐승을 깨우는 법고(북), 지상에 머무는 중생을 깨우는 범종(대종) 등 사물을 울려 만물을 깨운다. 농악기로 연주하는 전통문화 사물놀이에서 ‘사물’의 기원이 불교의 사물이라는 말도 있다. 

새벽예불에서 사물로 동물과 사람을 깨운다는 말을 듣고 이런 상상을 했다. 생명들을 깨우는 순서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먼저 목어를 쳐서 물속 생물을 깨우고 그 다음 운판을 쳐서 새를 깨운 뒤, 법고를 쳐서 네발 달린 짐승을 깨우고 맨 마지막에 범종을 쳐 인간을 깨운다고 생각했다. 불교라면, 먹이사슬의 말단에 있는 이들을 먼저 깨우고 상위 포식자를 나중에 깨워 ‘약한 짐승이 자다가 억울하게 먹히는 일은 없게 하지 않을까’하는 상상이었다. 

승려였던 불교 관계자 몇에게 이런 ‘상상’에 대해 물었다. 결론은 ‘그런 해석은 처음 듣는다’에 가까웠다. 일단 사물에는 각각 그만의 뜻이 있었고 사찰마다 사물을 치는 순서가 달랐다. 범종을 치는 행위는 지옥문을 여는 의미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내 상상의 맥락과 맞지 않았다. 

다만 종이나 목탁 등을 칠 때, 처음엔 슬쩍 건들고 점점 소리를 키워간다고 했다. 무생물인 나무나 쇠 역시도 깜짝 놀라지 않겠냐는 설명이었다. 듣는 생명체들도 자다가 갑자기 놀라지 않겠냐는 뜻으로 들렸다. 여하튼 이러한 상상으로 동물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봤다는 점에선 만족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다분히 수직적이다. 인간은 동물을 조련해 사용하거나 키워서 잡아먹는다. 인간은 동물을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을까. 생명을 ‘고기’로 상품화하는 건 윤리적으로 괜찮을까. 먹고 살기 위해 동물의 자율성을 박탈하는 건 필요악일까. 인간은 생태계에서 어디쯤 위치할까. 인간은 어디까지 먹을 수 있고 무엇을 먹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런 이들을 위한 책이 있다. 최미랑 경향신문 기자가 쓴 ‘섭식일기’다. 

▲ 섭식일기/ 최미랑 지음/ 오월의봄 펴냄
▲ 섭식일기/ 최미랑 지음/ 오월의봄 펴냄

 

최 기자는 (잡아먹히는) 동물에 대해 고민한 과정을 책에 담았다. 고기를 먹던 시절의 일상에서 고기를 끊어가는 과정을 담은 기록물이다. ‘채식주의자가 채식하는 이유를 적은 책’이라고 요약하기엔 건조하다. 메를로 퐁티가 말했듯 우린 ‘순진무구함’과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폭력의 종류를 선택할 뿐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진 한 폭력(살생)은 숙명이기 때문이다. ‘무얼 먹을까’라는 질문은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문제다. 

‘어차피 짐승은 잡아먹힌다’는 문장은 자연스럽지 않다. 자연에서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는 건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닭을 먹기 위한 목적으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하게 닭장에 밀어 넣고 알을 채취하다가 원하는 시점에 죽여서 판매하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표현하긴 부적절하지 않나. 

인간은 ‘인간을 수단화하지 않아야 한다’고 (겉으로는) 주장하지만 ‘동물을 수단화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았다. 인간은 고등어를 물‘고기’로 부르며 고등어 두‘마리’를 한‘손’으로 세어가며 사고팔 자격이 있을까. 고등어를 한‘명’처럼 대한다면 그들이 물 밖에서 숨 막혀 죽어갈 때 고통을 한번쯤 생각하지 않을까.  

저자는 우리가 어디까지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지 질문한다. 이미 일부 국가에서 금지하고 있는 ‘문어와 낙지, 쭈꾸미 등을 산 채로 끓는 물에 넣는 일’은 관둘 수 있나. 소가 먹는 곡물을 다른 대륙에서 굶고 있는 다른 인간들에게 분배하고 소고기 소비를 줄일 수 있나. 2008년 미국산 소고기 파동 때 소고기 수입을 국력의 문제로 생각했지만 고기를 생산하는 과정 자체를 충분히 돌아본 걸까. 고기를 만들기 위해 공기가 오염됐는데 미세먼지에 삼겹살이 좋다고 홍보하는 게 모순적이진 않나. 고기를 먹지 않고 사는 삶은 가능한가. 
 
이 책은 “어떤 사회에서 ‘주류’ 혹은 ‘다수자’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83쪽) 못 느껴본 사람이라면 통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란 늘 유무언의 질문에 시달리며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채식을 선택한 이들도 질문공세에 시달린다. 저자는 수산시장에서 겨울 제철인 방어회를 먹고 나와 ‘어제 먹은 잔치국수 국물에 희생된 멸치는 괜찮고 커다란 방어는 안 괜찮은가’란 질문에 괴로워했고(144쪽), ‘고기는 왜 안 먹게 됐느냐’는 질문(117쪽)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에 대한 묘한 시선을 받곤 한다. 
 
그렇지만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질문공세에 시달리진 않는다. 그 돼지가 어떤 유통과정을 거쳤는지 확인하셨나요? 그 돼지는 어떻게 길러졌는지 아시나요? 그 돼지가 얼마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키워졌는지 보셨나요? 넓은 바다에 헤엄치다 좁은 수족관에 가두는 게 불쌍하진 않나요?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일기처럼 나열한 듯 보이지만 동물을 ‘고기’로만 대하는 사회에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책의 주제와 달리 글의 전체적 분위기는 무겁지 않고 저자의 즐거운 상상과 경험으로 채워져있다. 가족과 일에 대해 많은 이들이 겪는 경험에서 조금씩 다른 생각과 판단을 했을 뿐이다. 홍은전 활동가가 추천사에서 말했듯 “타자를 존중하기로 마음먹고 매일 실천하던 사람이 자기 자신도 존중하게 돼버렸다는 이야기”이면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은 깨달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막막한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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