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업계에 ‘10조 원’이 화두다. 방송법은 자산총액 10조 원 이상인 대기업은 방송사 지분 10%를 초과해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규모가 큰 기업이 방송을 사유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그런데 방송을 소유한 대주주들의 자산 총액이 10조 원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최근 KBC 광주방송의 대주주 호반건설과 UBC울산방송 대주주 삼라마이더스그룹이 이 기준을 넘겼고, SBS의 실질적 대주주인 태영건설은 자산총액 10조 원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런 가운데 15일 한국언론학회와 방송통신위원회가 공동으로 구성한 공공성포럼은 ‘민영방송의 공공성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 방안’ 토론회를 열고 민영방송 제도 개선에 대한 논의를 했다.

▲ ‘민영방송의 공공성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 방안’ 토론회. 사진=유튜브 중계 캡처
▲ ‘민영방송의 공공성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 방안’ 토론회. 사진=유튜브 중계 캡처

‘10조 원 기준’ 적절하지 않다 한 목소리

이날 토론회에서 현실적으로 10조 원 기준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2008년 규정한 ‘10조 원 기준’이 현재 경제 규모를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영주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전문대학원 교수는 “공정거래위원회는 내년부터 대기업 자산 규모 기준을 GDP와 연동해 올릴 예정”이라며 “방통위가 이를 수용할지를 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상파 방송의 공익성과 공공성이 중요하다는 이유만으로 10조 원 이상의 대기업은 안 된다고 하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10조 원 기준’을 유지할 경우 이를 사업자가 역으로 이용하는 문제도 있다. 이영주 교수는 “울산방송과 광주방송은 5년에 한번 꼴로 대주주가 바뀌었다”며 “수익성이 떨어지면 매각하고 지상파방송을 떠나는 전략을 쓰는 상황에서 열악한 지역방송을 포기할 명분을 주게 된다”고 지적했다.

대주주 대기업 집단 지정을 목전에 둔 SBS는 해당 규정 개정 여부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당사자다. 박석철 SBS 전문위원은 “올해 12월 말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 자산규모를 평가하게 되는데 TY홀딩스와 SBS 모두 주식회사이기에 지분을 매각하거나 자산을 처분하기는 쉽지 않다”며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으면 사회적 논란이 벌어질 수 있다. SBS가 살아남기 위해 돈을 빌려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10조 원 기준을 넘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석철 전문위원은 “‘10조 원 기준을 높이는 것이 대기업의 방송 진출 길을 열어준다는 비판에 반대한다. 종사자들은 오히려 주인이 바뀌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 서울 양천구 목동 SBS 사옥. ⓒ 연합뉴스
▲ 서울 양천구 목동 SBS 사옥. ⓒ 연합뉴스

기준 높이면 민영방송 문제 해결될까?

10조 원이라는 기준을 바꿀 필요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이 기준 개정이 ‘만능 열쇠’도 아니다.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은 ‘10조 원 기준’을 바꾼다고 해서 자동으로 공공성이 강화되거나 경쟁력이 확보되지 않는 점을 강조했다. 

김경환 상지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는 “5조 원대 기업은 언론에 영향력을 안 미치나? 얼마든지 미칠 수 있다. 중요한 건 기업 규모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그는 “언론을 자신들의 사업에 도구로 이용하는지를 체계적으로 감시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이를 촘촘하게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대주주가 방송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는 장치가 충분히 마련됐다면 자산규모 기준을 확대해줄 수 있다. 그런 논의 없는 규제 완화는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고 했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최대 주주 심사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김동찬 정책위원장은 “민영방송 대주주에 대한 규제 수단 확보 필요성에 대해서도 공감이 이뤄졌으면 한다. 지역 민영방송은 건설자본이 대주주인 경우가 많은데 방송을 도구적으로 사용한다”며 “방송이 대주주의 주된 사업 영역이 아니거나, 방송을 이용해 다른 사업의 지배력을 높일 가능성이 크다면 적격성 심사를 통해 여러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상원 경희대 미디어학과 교수는 “자산총액 기준을 완화하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대주주의 방송 편성, 제작 자율성 침해를 막을 수 있는 거버넌스를 만들어야 한다”며 대표이사 공동추천제, 임명동의제 등 제도화를 제안했다.

산업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를 금기시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박석철 SBS 전문위원은 “소유, 경영 분리라는 원칙에 동의할 수 없다. 방송을 소유한 대주주에게 경영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방송 사업에서) 탈출하게 하는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경영 독립보다는 편성의 독립을 보장해줘야 한다”며 “SBS가 적자 규모를 줄이고 투자를 받아 CJ ENM, JTBC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규제를 줄여줘야 한다”고 밝혔다.

이영주 교수는 지역 민영방송의 소극적 투자 경향을 지적하며 더 큰 규모의 기업이 민영방송을 소유한다 해도 투자 규모가 크게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UBC, KBC 대주주 변경 현황. 자료=한국언론학회 유튜브 영상(이영주 교수 발표자료)
▲ UBC, KBC 대주주 변경 현황. 자료=한국언론학회 유튜브 영상(이영주 교수 발표자료)

이영주 교수는 “10조 원 규제를 풀면 시장이 좋아질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며 “민영방송, 특히 지역 민영방송의 소극적인 투자 문제는 지분 제한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 지상파의 광고매출 감소와 유료방송에 채널을 제공하고 받는 대가인 재송신료(CPS)가 인상보다는 인하 요인이 강한 점을 지적하며 앞으로 지역 민영방송의 경영 여건이 더욱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영주 교수는 대안의 일환으로 수평 및 수직결합 완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반드시 10개 지역 방송권역을 구분해야 지역성과 공공성이 구현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동일한 권역에 속한 방송은 합병이 가능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케이블SO 등 플랫폼사업자와 겸영도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지사파방송 규제완화를 요구하는 게 금기시돼 있지만, 공공성과 공익성, 사회적 가치 구현을 위해서라도 지속 가능성이 있도록, 대주주가 떠나지 않도록 규제를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상원 경희대 미디어학과 교수는 종편과 같은 민영방송사지만 지상파 방송사로서 강한 공적 책무가 부과된 지상파 민영방송의 상황을 설명한 뒤 방송사업자의 공적 영역 및 민간 영역의 성격 전반을 재편하는 여러 논의를 소개했다. 이상원 교수는 “여러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기는 어렵지만 민간 영역에서도 어느 정도 공공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효율성, 자율성, 창의성 및 방송 산업의 혁신과 성장을 중점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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