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회의가 5월21일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광주 광산구을)이 대표 발의한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과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이들 두 법률에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로 1980년 강제 해직된 언론인이 포함돼 광주항쟁과 관련해 41년간 왜곡됐던 역사 하나가 바로잡혔다. 광주항쟁의 큰 틀과 내용을 담았던 두 법이 1996년 제정 당시 80년 언론 투쟁이 불법해직이 그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진실에 맞게 개정되었다. 동시에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면서 광주항쟁과 언론항쟁을 분리시키고 광주항쟁을 지역항쟁으로 조작하려던 공작이 41년 만에 격파됐다.

국회, 5·18민주화운동에 80년 언론인 투쟁 포함시켜

이번에 광주항쟁이 광주일원만의 항쟁이 아니라 전국 언론사의 언론인 투쟁도 포함되는 것이 법에 의해 확인되면서 1980년 한국기자협회와 전국 언론사 기협 분회 소속 언론인들이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에 항거해 검역, 제작거부를 하면서 벌인 투쟁이 광주항쟁과 되었다. 이로써 광주항쟁이 전국 규모에서 벌어진 진실이 만천하에 확인되고 광주항쟁과 언론투쟁에 대한 역사바로잡기가 완성의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80년 언론투쟁에 대해 폭거를 저지른 이유는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에 전국 언론인들이 검열, 제작거부로 정면 대항했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인들은 한국기자협회가 주축이 되어 10·26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자행된 언론탄압을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와 언론자유 회복, 유신언론인 청산 등을 외치며 5월16일 전국 언론사에서 검열거부를 감행할 계획을 확정했었다.

그러나 신군부가 80년 5월17일을 기해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기자협회 김태홍 회장 등 간부들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동시에 대학가와 시민사회의 민주인사, 야당 정치인들을 대거 연행, 감금하는 폭거를 저지르며 광주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신군부는 광주 학살의 진상을 왜곡하고 광주를 폭도로 모는 허위발표를 언론에 보도하도록 강제했다.

전국 언론사는 신군부의 광주 학살 만행 중단과 정상적인 보도를 요구하며 개별 사별로 사원 또는 기자총회를 열어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학살에 항거하는 투쟁을 시작했다.  광주 항쟁기간 동안 신문·방송·통신의 제작은 중단되지 않아 국민들에게 언론의 군부에 대한 항거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광주항쟁기간 동안 광주 일원을 제외하고 신군부에 저항한 세력은 언론계가 유일했다. 전두환은 주요언론사 사장을 불러 언론인들의 검열, 제작거부 중단을 지시하면서 협박하고 일부 언론사 정문 앞에 장갑차를 배치하는 등의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광주에 파견된 기자들과 외신기사를 통해 계엄군의 광주시민, 대학생에 대한 살육, 폭력행사에 분노한 전국 언론인들은 항거를 계속했고 광주가 계엄군에게 짓밟힌 1980년 5월27일 분루를 사키며 검열, 제작거부를 중단해야 했다.

당시 신문 방송은 신군부의 강압으로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몰아가는 식으로 보도하면서 광주 지역 두 방송사가 불타기도 했다. 당시 언론이 내부에서는 신군부에 대한 항거가 벌어진 해방구였다 해도 대외적으로 신군부의 나팔수로 전락해 반민주 반민중적 언론행각을 벌인 것이다. 이에 대해 80년 투쟁언론인들도 무한책임을 진다는 점을 가슴 깊이 새기고 5공화국 등장과 함께 말지 창간 등을 통한 반독재 투쟁을 벌였다.

광주 항쟁 발생이후 41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5·18 당시 계엄군에 발포 명령을 내린 자가 누구인지, 계엄군이 시민군을 향해 헬기 사격을 가했는지 등 이 아직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런 역사적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0년 말 개정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의해 발족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 “5·18 진압 당시 실질적인 지휘체계, 발포 명령 체계를 조사하고, 광주 현지에서의 민간인 살상, 상해, 성폭력 등과 같은 인권침해 사건을 밝히며, 암매장과 행방불명자를 찾는데 주력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전두환(90) 전 대통령이 지난 5월10일 광주지법 법정동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열린 5·18 당사자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사건 항소심 첫 재판에 불출석해 여전히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는 파렴치한 모습을 반복했다. 전씨 측 변호인은 항소심에서는 법리상 피고인이 불출석한 상태에서 재판 진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맞지 않는 얘기"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전씨가 출석하지 않아 피고인의 신원을 확인하는 인정신문, 공소 사실 및 항소 이유 확인 등 절차를 진행하지 못하고 공판기일을 다시 지정한 뒤 재판을 마무리했다(연합뉴스 2021년 5월10일).

5·18 발생 반세기 가까이 지났는데도 그 진상 규명 작업이 미완이고 5·18 학살의 주범 전두환이 파렴치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 2022년 5월에는 되풀이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역사바로잡기가 이뤄져야 정의와 진실이 모두의 가치로 인정받아 진정한 민주화, 남북평화통일이라는 빛나는 미래 창조가 가능할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아 한국 사회를 되돌아 볼 때, 80년대 민족민주운동 발전의 출발점은 5·18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되었고 그 추동력은 지금도 여전히 뜨겁고 강력하다. 유신체제를 승계 하려는 신군부 독재체제의 재편 기에 나타난 5·18민주화운동은 공수부대의 진입과 양민학살에 대한 국민의 무장저항, 군부의 무차별 진압으로 전개되었고, 광주항쟁을 통해 80년대 민주화운동은 변혁적 사회운동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조희연, 80년대 한국사회운동의 전개와 90년대의 발전전망, 한국사회운동사, 한울, 1990, 15~25쪽).

5·18민주화운동을 통해 확인된 80년대 사회운동의 특성을 보면, 지배 권력의 폭력성을 극복의 대상으로 부각시킨 의식이 확산되면서 미국의 군부세력에 대한 지원의 확인을 통해 반외세자주화역량 확보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 등을 들 수 있다.

군사정권은 군부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민주화 추진세력에 대한 탄압, 와해 노력을 벌이고 학생 운동권을 중심으로 80년대 사회운동이념 및 실천방안이 다양하게 제시됐다. 83년 들어 군사정권이 체제의 재정비와 권력의 공고화를 마친 뒤 민중적 불만을 체제 내로 수렴키 위한 유화정책을 실시하게 되면서 사회운동 세력들은 확대된 합법적 활동공간을 활용, 사회운동의 대중적 활성화를 촉진키 위한 활동을 강력히 전개한다.

5·18민주화운동은 87년 6월 항쟁의 실질적인 동력으로 폭발하고 이어 쟁취된 민주화가 지속적으로 추진되면서 97년 투표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로 연결된다. 광주 정신인 민주, 인권, 평화는 5·18기념재단의 HP 중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소개 의 글 속에 아래와 같이 언급되어 있다.

--- 군사정권이라는 무거운 탄압 속에 오랫동안 숨죽이고 살았던 한국의 풀뿌리들은 1980년 광주를 통해 어느 한 계층에서만 외쳐왔던 민주 자주 인권 통일이라는 기치를 그들 가슴 내부에 자연스레 구호로 형성시켰으며 ‘민주주의’나 ‘인권사상’이 ‘민중’이라는 계층에 비로소 합류할 수 있는 시민 민주주의를 획득하게 되었다(https://518.org/nsub.php?PID=010206).

(5·18민주화운동으로 한국의 풀뿌리들은) 진정한 인권에 눈을 뜨게 됐으며, 부당한 권력에는 저항권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깨달았고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다.

신군부는 5월20일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연합사에 부대이동을 문의하자 주한미 대사 위컴은 미국정부와 협의한 후 동의(agreed)함으로써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다(https://518.org/nsub.php?PID=010205).

미 행정부는 “광주 사태가 더 악화될 경우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고 일반국민에게 광주민중항쟁을 부정적으로 부각시켜 신군부를 두둔했고 무력진압을 합법화시켰다. 80년대 이후 반미운동은 민주주의나 양민보호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체제 옹호적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광주항쟁이 기폭제가 된 한국의 민주화인 5·18 민중항쟁이 제3세계에 돋보였던 것은 항쟁 당사자들이 폭도로 몰리고 구속되는 암울했던 시절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 독재투쟁에 나섰으며, 마침내 제3세계의 진정한 민주화를 출발시켰다는 점이다(https://518.org/nsub.php?PID=010205).

5·18민주화운동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 자치공동체의 형성 및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세계적 인권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

이상에서와 같이 5.18기념재단의 HP에 서술된 5·18 민중항쟁 정신인 민주, 인권, 평화가 지닌 각각의 개념 정의를 하면 아래와 같다. 민주는 ‘부당한 권력에는 저항권이 있다는 것과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기술에서 그 뜻이 확인된다. 즉 그것은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을 통해 자주적으로 창조하고 수호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는 올바른 권력의 창출과 시민 권익의 실천이 자주적 과정을 통해 극대화되는 민주주의의 창조와 유지 속에 발현될 수 있다는 것으로 정의된다.

▲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이 광주 금남로에서 한 시민을 연행해 탱크 앞에 무릎을 꿇리고 있다. ⓒ연합뉴스
▲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이 광주 금남로에서 한 시민을 연행해 탱크 앞에 무릎을 꿇리고 있다. ⓒ연합뉴스

인권은 ‘5·18민주화운동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 자치공동체의 형성 및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세계적 인권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기술에서 역시 그 의미가 확인된다. 인권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출발이면서 종착점이라는 것으로 자치공동체 형성과 정의 구현 속에서 확립된다는 의미로 정의할 수 있다.

평화는 ‘한국의 풀뿌리들은 1980년 광주를 통해 어느 한 계층에서만 외쳐왔던 민주 자주 인권 통일이라는 기치를 그들 가슴 내부에 자연스레 구호로 형성시켰으며’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 자주, 인권, 통일 등이 완성된 상태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통일이 포함된 것은 외세의 부당한 개입과 간섭을 배제한 자주적 통합을 지향하는 뜻이 함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평화를 살필 때 미국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광주 학살이 가능토록 사전적 조치에 동의했다는 사실과 함께 ‘80년대 이후 반미운동은 민주주의나 양민보호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체제 옹호적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표현이 주목된다. 이 표현은 남북 분단 현실 속에서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을 고발하면서 남북 평화통일의 당위성을 웅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반도 평화는 평화통일을 통해 구현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여 진다.

광주항쟁기간 언론인 투쟁과 신군부의 1천 여 명 불법 해직

80년 광주항쟁 기간 동안 신문, 방송 등의 대중매체는 신군부의 나팔수, 선전매체가 되어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몰아 시민들을 학살한 행위를 거짓으로 포장했다. 당시 대중매체는 계엄사의 검열을 사전에 받아야 하는 상황이어서 외부에는 신군부에 부역한 것으로 비춰졌고 그로 인한 비판 등이 쏟아졌다.

그러나 당시 대중매체는 외부에서 볼 때 신군부의 하부구조로 반민주, 반민중적 폭거를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 내부는 신군부의 광주학살에 항거한 양식 있는 언론인들의 해방구였다. 전국 대부분 신문 방송사 내부에서는 언론인들이 신군부의 광주 항쟁 기간인 1980년 5월 20~27일까지 신군부의 양민학살 폭거에 항의해 검열 및 제작거부 투쟁을 벌였다.

이런 투쟁은 계엄사의 검열, 신군부의 압박에 의해 보도는커녕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외신들의 전국적인 언론인 저항에 대한 보도도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는 계엄사가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그러나 신군부는 언론인들의 항거를 중단시키려 갖가지 공작을 벌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전두환이 직접 전면에 나선 것이다. 그는 주요 대중매체 사장들을 불러다가 언론인들의 투쟁 중단을 요구하고 주요 언론사 앞에 장갑차를 배치하는 방법 등으로 협박 공갈을 했지만 언론인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전두환은 광주항쟁이후 정권 찬탈을 하는 과정에서 언론인 1천 여 명을 불법 강제 해직 시켰다. 광주항쟁기간 동안 신군부에 저항한 세력은 광주일원의 시민들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언론인들이 유일했다. 광주를 피 바다로 만든 뒤 등장한 전두환은 언론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등 20세기 최악의 독재 정치를 자행했다.

제5공화국 언론은 보도지침 등으로 완벽하게 정권의 나팔수 역할로 전락했다. 그러나 해직언론인들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이 되어 언론민주화 운동을 벌이면서 ‘말’지 등의 비합법 매체를 통해 민주, 민족 평화 언론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어 1988년 해직언론인들이 주축이 되어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지만 노태우 정권이 신문 발행의 문호를 넓힘으로써 신문 시장에서 과당 경쟁이 벌어지는 구조가 형성된다.

국내 정치권은 1997년 5·18 특별법을 만들면서 1980년 신군부에 저항한 언론인 투쟁을 제외시켰다. 이는 광주 항쟁을 지역항쟁으로 축소왜곡하려는 거대한 음모의 결과였다. 그러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이영조)가 2010년 1월7일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 및 언론사 통폐합 사건에 대해 정치권력의 불법행위라고 결정했다. 이후 자유선진당 박선영의원, 전병헌 민주당 의원, 허원제 한나라당의원이 2010년 1980년 불법강제해직언론인의 명예회복 및 배상 등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출했으나나 18대 국회가 종료 되면서 폐기됐다. 그렇지만 19~21대 국회에서 80년 투쟁언론인 관련 특별법이 제안됐다. 80년 언론인 투쟁을 광주에 포함시킬 경우 ‘광주’의 전국화와 세계화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10·26이전의  군부 독재와 대중매체, 그리고 언론인들의 저항

한국 신문은 19세기 후반 개화운동 속에  탄생했으나 사회적 영향력 확산 이전에 일본의 한반도 강점으로 민간지가 급격히 쇠퇴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일제의 통치수단의 하나로 민간지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동아, 조선의 보도 영역에서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보도, 논평이 원천적으로 제외되었다. 이점에서 외세에 부역한 반민족적 언론행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해방 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치 못한 언론은 정치권력의 통제를 받는 등 일부 언론은 여전히 국민에게 봉사하는 언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4·19 뒤 언론은 사회목탁으로 등장할 기회가 있었으나 5·16쿠데타로 그 기가 꺾이고 만다. 군부통치 속에서 반민중적 언론 활동을 강요받는 순치된 언론의 모습으로 변했다. 박정희 정권 18년과 80년의 `언론학살'에 이어 5공화국 기간 동안 언론은 혹독한 시련기를 거쳤다. 25년간 군화에 짓밟힌 언론의 모습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즉 언론사 통폐합이 61년, 72년, 80년 등 3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기자대량 해직 또한 72년,75년, 80년 등 3회에 달한다. 언론에 제약을 가한 법률은 20여개나 되고 불법적 보도지침시달과 이행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뤄졌다. 그 밖에 긴급조치. 계엄선포에 따른 한시적 언론기능 억제도 수회에 달한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 초부터 언론에 대한 집요한 공세를 폈다. 그 결과 언론계는 점차 위축되어 67년 이후 기자의 구속․폭행 등의 사건이 발생해도 보도조차 않게 되었다. 이 같은 언론의 무기력증에 대해 67년 선거를 고비로 대학생과 독자들의 비판 및 언론계 내부의 자성이 고개를 든다.  즉 71년 4월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언론자유 수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그해 10월 제2의 언론자유 수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군부는 71년 12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을 통과시켜 언론탄압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에 이어 10월 유신헌법이 등장하자 언론은 유신체제의 홍보기구로 전락했다. 박 정권은 기자 신분증 발급제도를 통해 행정적인 언론 통제를 강화했다. 즉 기자 신분증을 발급하는 과정에서 권력이 언론인 자격 유무를 사전 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 정권은 이어 ‘언론 자율정화’라는 이름으로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언론인을 내쫓았다. 즉 8개 지방지가 3개로 줄어들고 전국 기자 수는 6천3백여 명에서 3천4백여 명으로 감소했다. 73년 방송법이 개정되어 방송윤리위원회가 자율기구에서 법적 기구로 바뀌어 검열기능이 커졌다.

대학가와 시민사회의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이 커지자 박 정권은 74년 1월 긴급조치 1호 선포에 이어, 다음해 5월까지 9회에 걸쳐 긴급조치를 양산했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75년5월은 인도지나 반도가 공산화되고 국내에서 개헌논의가 고개를 드는 상황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개헌논의 금지, 집회·시위금지와 함께 언론의 그에 대해 보도하는 행위도 금했다. 언론을 극도로 위축시킨 긴급조치 9호는 4년7개월이 지난 79년 12월에야 해제되었다. 9호 해제는 10·26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상태에서 더 이상 존속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 정권의 거듭된 긴급조치아래에서 언론탄압이 더욱 노골화되자 기자들의 자유언론 수호운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동아일보. 한국일보에서 노조결성이 시도되었으나 좌절되었다. 그리고 74년 1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동아일보 광고탄압이 일어났다. 75년 언론자유운동에 앞장섰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들이 무더기로 해직되었고 이 운동을 지원하던 기자 협회보가 폐간되었다. 이후 10·26까지 4년여 동안 언론은 철저하게 권력에 유린당했다. 정보부기관원은 언론사에 전화 한 통화로 가시를 줄이고, 뺄 수도 있었다. 물론 권력에 편입되기를 바라던 어용 언론인의 자발적 협조도 국민의 알권리를 크게 훼손했다.

5·18 광주 항쟁전후의 신군부 공작과 언론인들의 분노

10·26 이후 언론계는 계엄사의 비이성적이고 부당한 언론검열이 언론기능을 마비시키고 사회민주화를 저해하는 것에 반발한다. 대학가와 시민사회단체 등의 정치 민주화 주장 및 운동과 언론자유 억압에 대한 비판도 언론을 크게 자극한다. 80년 3월 기자협회 집행부가 정상화되어 언론자유 운동의 선봉에 서면서, 중앙 및 지방의  많은 언론사들은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통해 비상계엄령 해제, 검열철폐, 사실보도 구현 등을 주장했다. 기자협회는 계엄사의 검열로 신문 방송에 보도되지 않은 기사들을 모아 유인물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전국 대부분의 언론사에서는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신군부가 자행한 민주화에 역행하는 갖가지 공작을 규탄하면서, 언론의 자성과 본연의 사회적 기능 회복을 주장했다. 언론 운동이 활발했던 중앙 언론사는 동아일보, 중앙일보, TBC, 합동통신, 기독교 방송, 경향신문, 동아방송, 한국일보, 문화방송 등이었다.

지방언론사들도 자유언론운동에 합류한다. 부산과 광주, 대구 언론사 등에서 검열철폐와 제작거부 운동이 벌어진다. 부산진 경찰서 출입기자들이 5월2일 자유언론 확보 선언을 한데 이어 국제신문 기자들은 5월6일부터 9일까지 검열철폐, 편집권 독립, 노조결성 보장 등을 요구하고 신문제작을 지연시키며 철야농성에 돌입한다. 전남매일 신문이 5월13일, 대구문화방송과 매일 신문이 15일, 전남일보가 각각 검열거부를 천명한다.

광주학살과 신군부의 보도금지 조치

전국 언론사 기자협회 분회들이 주도한 언론자유실천운동과 검열거부 결의 등이 고조되면서 기자협회가 5월16일 검열거부 실천운동을 하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그 다음날인 5월17일 전국비상계엄확대조치가 내려지면서 기자협회 간부 등이 포함된 언론인들과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선풍이 분다. 기협이 군화 발에 유린되었지만 기협의 결의사항은 전국의 기자들에게 이미 전달되어 있었다. 기협이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에 접한 기자들은 비통과 울분에 싸여 있을 수도 없었다. 광주에서의 계엄군 만행이 자행되는 야만적 참극이 발생한 것이다. 계엄군이 광주 시민을 무차별 살상하는 참극이 벌어지고 계엄당국의 광주 참상에 대한 보도 금지조치가 내려진다.

정치군인들의 광주 학살은 국제 사회를 경악케 한 반(反)문명적 대 사건이었다. 그것은 외신기자들에 의해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게 군이 통제하고 있었다. 그것은 20세기 한 가운데에서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참담한 비극이었다. 젊은 기자들은 분노했다. 많은 언론사에서 신군부의 만행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저항의 열기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계엄군의 양민 학살에 대한 소식이 속속 전해지면서 언론사 분위기도 급변했다. 신군부에 대한 분노의 열기가 상승했다. 군은 광주에서의 계엄군 난동과 양민의 저항을 보도치 못하도록 계엄사 언론 검열 단을 통해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린 상태였다. 검열 단의 납득할 수 없는 보도통제와 광주현지 주재 기자 등을 통해 전해지는 현지의 참담한 소식에 전국 언론사의 분위기는 더욱 격양되고 있었다. 외신은 광주 현지에서 벌어지는 군인들의 야만적인 행동을 시시각각 보도하고 있었다. 외신을 접한 젊은 기자들은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는 언론 현실에 대한 무력감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더욱이 전 세계가 알고 있는 비극을 그 참극이 벌어지고 있는 당사국의 국민이 알지 못하는 현실은 언론인들에게 커다란 수치심으로 다가갔다.

많은 언론사의 기자들은 퇴근 시간이 지나도 편집국을 떠나지 못했다. 광주의 의미는 너무 심각했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시국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기자들의 모임은 시간이 흐르면서 편집국 전체 기자 총회 또는 언론사 전체 사원총회 상황으로 발전했다. 거기에서 기자협회가 신군부에게 짓밟히기 전에 행한 결의 사항을 실천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전국 언론사 편집국, 보도국 등에서 기자 총회가 열리는 동안 보안사, 경찰의 감시와 언론사 동태 파악이 이뤄지고 있었다. 언론사내에 동료를 신군부 쪽에 밀고하는 동조세력도 있었다. 보안사와 문화공보부 쪽은 각 언론사의 검열 및 제작 거부 주동 기자를 정탐해 신군부에게 보고한다. 신군부에 맞선 기자들은 언론사 안팎의 적들과도 싸워야 하는 샌드위치 투쟁을 벌여야 했다.

1980년 5월 전국 언론사별 투쟁

서울 지역 언론사들을 중심으로 5월20일 검열 및 제작 거부 행동이 시작되고 부산 등지의 언론사들도 동조했다. 서울 시청에 나가있던 검열담당 기자들이 철수했다. 그리고 취재하지 않거나 취재한 것을 본사에 송고하지 않는 제작거부가 실천되었다. 그것은 신군부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언론사별 투쟁 상황은 다음과 같다.

① 경향신문 : 5월 19, 20일 이틀간 편집국 기자 1백여 명(국장단, 부장단 전원 참석)이 검열거부와 제작 거부 문제 등을 협의한다. 기협 회장단 연행과 구금에 항의해 철야농성을 벌였다. 21일부터 평기자들이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부장, 차장 단은 제작이 완전 중단될 경우 신문 폐간조치가 내려질 것을 우려해 제작에 임했다. 신문이 파행적으로 발간되자 차장단도 3일간 제작을 거부한 뒤 기자들이 제작에 복귀키로 합의하는 등 내부 논의가 계속되었다. 27일 광주가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뒤 기자들도 전원 제작에 복귀했다.

② 동아일보, 동아방송 :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은 5월20일부터 제작거부에 돌입 한다. 동아방송 기자들은 언론자유 소위원회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언론자유를 위해 노력키로 결의한다.

③ 동양통신 : 19, 20일 연이어 기자총회를 열어 21일부터 광주항쟁의 진실보도를 촉구하며 검열, 제작거부에 돌입한다. 투쟁이 5일간 계속되다가 기자 총회를 열어 제작복귀를 결정했다.

④ 문화방송 : 20일 보도국 기자들은 총회를 열어 격론 끝에 기사 제작 송고를 거부하키로 결의하고 이날부터 시행한다. 그에 따라 일부 프로가 도중에 방송이 중단되고 뉴스 방영도 단축되었다.

⑤ 조선일보 : 기자들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21일 기자 총회를 열려다 사측 방해로 실패하지만 다음날 총회를 강행한다. 검열, 제작거부를 결정하고 결행한다.

⑥ 중앙일보 : 중앙일보, 동양방송 기자, 국장단과 부장단이 참석한 총회가 19일 열려 광주항쟁의 왜곡보도를 시정하고 진실 보도될 때까지 제작을 거부한다고 결의한다. 20일부터 25일까지 제작을 거부한다. 그러나 제작거부에 불참한 가운데 만들어지는 신문이 왜곡과 은폐의 폐해가 심해지자 27일 제작에 참여한다.

⑦ 한국일보 : 19일 기자총회를 열고 20일부터 차장 이하 기자들이 참여한 검열,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검열, 제작거부가 1주일을 넘기면서 광주가 피바다가 되는 공포분위기 속에서 신군부의 폐간 위협을 들어 검열거부 투쟁을 중단할 것을 주장하는 쪽과 끝까지 투쟁할 것을 주장하는 쪽이 대립하다가 표결에 들어갔다. 근소한 차이로 검열거부 투쟁이 부결되었다.

⑧ 합동통신 : 21일 기자총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제작거부를 결정해 돌입한다. 기자 전원이 검열, 제작거부 참여에 서명했다. 검열거부를 위해 시청에 나가있던 기자를 철수시키고 유신언론인 퇴진을 요구하며 그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등의 투쟁을 벌인다. 사측이 제작, 검열거부에 대해 재 논의할 것을 기협분회에 요구한 뒤 기자들이 마라톤 회의 끝에 표결에 부치지만 다시 가결된다. 검열, 제작거부는 27일까지 강행된다.

⑨ 현대경제, 일요신문 : 광주항쟁이 벌어진 뒤 5월 21일 기자들은 편집국에서 기자 총회를 갖고 기자협회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4일부터 기자들이 검열, 제작 거부에 돌입하고  부, 처장들만이 제작에 임했다.

⑩ KBS는 12, 13, 16일 자유토론을 갖고 독재체제 아래에서의 언론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언론의 사명을 다 할 것을 다짐한다. 일부 기자들이 검열, 제작거부에 동참했다.

⑪ CBS : 기자 총회를 거쳐 광주항쟁 기간 동안 검열, 제작거주 투쟁을 벌였다.

⑫ 전남매일 :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광주에서 언론검열이 강화되어 광주 현지 언론에서조차 18,19,20일자에 계엄군의 폭거와 시민 저항 등이 보도되지 못했다. 광주항쟁 이틀째인 19일 처절한 참극현장을 목격한 일부 기자들은 다음날인 20일자 신문에 ‘19일의 특전사의 민간인에 대한 만행’ 보도를 관철시키기로 결의한다. 계엄군의 잔학상에 대해 편집 판까지는 만들었으나 인쇄 직전 회사 중역실 간부의 저지로 무산됐다. 21일부터 회사 문이 닫히자 일부 기자는 지하신문을 만들기로 했지만 이 또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전두환의 공갈 협박 속 언론인 투쟁 지속

광주에서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기자들의 외로운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광주 외의 지역은 신군부의 살기어린 위세에 눌려 얼어붙어 있었다. 전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광주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못했지만 광주를 탈출한 시민이나 광주 부근 친척들의 전화로 어렴풋이 현지의 참상을 접하고 있었다. 계엄사의 보도통제 속에 전국은 유언비어가 횡행했다. 언론사 기자들은 현지로 특파된 자사 기자나 외신을 통해 광주 상황변화를 시시각각 접하고 있었다.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고 있는 신군부의 저의는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아 ‘서울의 봄’이라는 민주화 열기를 잠재우려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드러나 보였다. 그들은 박정희 급사로 주인이 없어진 정치권력 탈취를 노리고 있었다. 신군부는 노골적인 정권 찬탈 야욕을 12·12 군사 반란 사건을 통해 만천하에 과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두환 등은 공포정치 속에서 정권 장악 음모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것을 기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정권 탈취에 눈이 뒤집힌 정치군인들이 양민 학살을 자행한 뒤에 무슨 짓을 할지 뻔했다. 상상만 해도 소름끼치는 상황이었지만 광주의 참극은 그런 공포를 압도 할 만큼 컸다. 기자들의 눈에는 동포를 학살하는 정치군인들은 같은 민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같은 말을 하고 비슷한 생김새였지만 전혀 다른 인종처럼 비춰졌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광주에서 피의 저항이 고조되면서 언론사에 대한 신군부의 무력시위와 공갈협박도 기승을 부렸다. 광화문의 일부 언론사 앞에 계엄사 장갑차가 24시간 버티고 서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언론사 쪽으로 구체적인 협박의 메시지도 전달되었다. 일부 언론사에는 계엄군이 투입되거나 계엄사에서 주동자를 체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일부 언론사에서는 주모자급 기자들에게 피신하라면서 도피 자금까지 지급한 일도 있었다.

많은 언론사 기자들이 편집국 총회와 전체 사원의 표결 등의 절차를 거쳐 검열 및 제작거부에 돌입하자 신군부는 노골적으로 협박에 나섰다. 언론의 저항은 보안사 등 정보기관과 언론 행정부처인 문화공보부 등의 감시 속에 그 실상이 신군부에 실시간으로 보고되었다. 언론사 내부에 이들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동료를 파는 동조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유신체제에서 박 정권에게 협조하고 10·26이후 등장한 신군부에게 추파를 보내고 있었다. 언론사의 저항운동을 한 눈에 파악하고 있던 신군부는 협박과 공갈, 회유로 맞불을 놓았다. 광주에서 학살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군인들의 언론에 대한 공세는 집요했다.

신군부의 핵이었던 전두환은 5월22일 서울 지역 신문, 통신, 방송사 사장들을 불러다 호통을 치면서 으름장을 놓는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군부 최고 실세인 그는 5·18계엄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언론사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한다. 그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 그 동안 언론과 대학의 내막과 누가 선동하는지도 샅샅이 알고 있다. 경영권자가 권한행사를 잘못한 탓이 아닌가. 앞장서 선동한 사람은 파악해 체포할 것이다. 그런 일이 없도록 사장들이 사태를 수습하라 ---

전두환은 전국 언론사 기자들의 검열거부에 대해 경고하면서 주동자는 구속 등 강경조치를 취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그것은 군의 정권 찬탈 의지와 광주에서 과시하는 피의 학살을 배경으로 한 공개적인 협박이었다. 전두환의 협박에 얼어붙은 언론사 사장들은 회사에 돌아와 전두환의 경고를 전하는 한편 내부 사태 수습에 발 벗고 나선다. 그것은 회사 간부와 유신언론인들을 동원해 검열거부를 저지하고, 언론자유를 외치는 기자들을 감시해 신군부 일당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전두환의 협박은 언론사 간부 등 유신잔당에게는 약효가 있었다. 그러나 분노한 젊은 기자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광주의 참상이 너무 참혹했고, 기자들의 의지가 굳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언론에 공개적인 공갈을 한 다음날인 5월 23일 서울에서는 언론의 저항이 최고조에 달했다. 극소수 언론사만 제외하고 검열거부가 실천되고 있었다.

광주 함락과 투쟁언론인들의 ‘피눈물’ 그리고 명예회복 투쟁

광주지역에서 계엄군과 시민의 격돌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신군부는 광주참극에 대한 보도 통제를 풀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문방송사가 계엄사의 발표문을 그대로 보도한 것에 불과했다. 군인들은 ‘광주시민을 난동분자 폭도 등으로 표기할 것’, ‘시위기사는 원칙적으로 보도 불가’ 등의 보도 통제지침을 내렸다.

당시 언론사 전체가 저항의 대열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언론 사주나 간부들은 다른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기자들이 손을 놓아버린 상황에서 검열과 제작 업무를 지속했다. 기자들도 그것을 양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언론관계법에 의하면 신문, 통신, 방송이 3일간 그 업무를 수행치 못하면 등록이 취소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군부는 언론사내의 ‘정상적 근무상태’로 임한 직원들을 통해 악의적으로 날조, 왜곡한 광주참극을 국민들에게 전달되도록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 언론사의 검열, 제작거부 움직임은 지속되었다. 신문과 방송이 모양은 험해도 계속 제작, 방영되고 있어서 국민들은 기자들의 저항을 알지 못했다. 언론사 내부에서 두 가지의 지향점이 다른 행동이 공존하는 비극적 상황 이었다.

무고한 시민이 흘리는 피비린내 속에서 언론인들의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투쟁은 계속됐다. 전국적으로 볼 때 광주 지역을 제외하고 기자들만이 신군부의 폭거에 저항하고 있었다. 광주에서 시민군의 저항이 처절하게 이뤄졌지만 신군부의 엄청난 무력 공세 앞에 그 결과는 누구의 눈에도 뻔했다. 끝까지 투쟁한다는 것은 군인들의 군화에 짓밟히거나 그들로부터 엄청난 보복을 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전국 언론사 기자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광주가 신군부에게 포위되어 있듯이 전국 언론사 기자들은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언론사의 편집, 보도국을 해방구 삼아 투쟁하는 언론인들도 자신들의 항거와 그 이후의 결과가 무엇일까를 각오하고 있었다.

광주 항쟁은 군의 광주 점령으로 일단락되었다. 기자들도 ‘피눈물’을 삼키면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광주의 열기가 진압되면서 투쟁의 에너지도 일단 그 기가 꺾였다. 광주 민주시민이 온몸으로 신군부의 폭거에 맞설 때 기자들은 펜을 놓고 광주시민과 뜻을 같이 했다. 신군부는 언론인들의 저항이 거센 것에 놀라 광주를 점령한 뒤 대대적으로 언론탄압을 자행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항쟁이후 정권 찬탈 작업을 본격화 하면서 당시 언론인들의 신군부에 대한 저항세력을 제거한다는 음모를 꾸며 언론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폭거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신군부는 △1980년 7월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와 폐간조치를 내려 수백 종의 월간지 등의 발행을 저지하고 △대중매체 언론사 전체를 상대로 일괄사표를 강요한 뒤 언론인 1천 여 명을 불법 해직시키고 △언론사 통폐합조치를 취해 전국 수십 개의 신문 방송사를 없애면서 3백 여 명의 언론인들이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고 △언론사를 장악하기 위해 언론악법인 언론기본법을 만들어 신문, 방송을 정부의 나팔수로 전락시켰고 △정보부, 행정기관 등을 동원해 보도지침을 만들어 언론보도를 철저히 통제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 전반에 걸친 야만적인 폭거는 정부수립이후 국내 언론에 가해진 최악, 최대의 언론탄압이었다. 신군부는 특히 언론인 1천 여 명을 불법 해직시키면서 해직 사유를 국시부정, 반정부 등으로 분류해 일반사회에 그 블랙리스트를 돌려 취업을 방해하면서 해직언론인들의 투쟁 구심점을 약화시켜 집단저항을 약화시키는 공작을 자행했다. 신군부와 그 동조세력은 김영삼 정권 들어 광주특별법을 만들 당시 광주 현지 투쟁과 언론인들의 투쟁을 분리시켜 특별법을 제정토록 만들면서 광주항쟁에 대한 역사적 사실조차 왜곡하고 훼손시켰다.

특히 80년 언론인 투쟁은 광주항쟁의 일부임에도 광주항쟁을 지역적인 문제로 국한하려는 신군부에 동조적인 정치권이나 공범 역할을 했던 일부 언론사에 의해 40년 동안 분리된 개념으로 왜곡돼왔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고 신군부의 치밀한 정치공작의 결과였다. 전두환은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기 위해 정부가 1985년 비밀리에 조직한 ‘80위원회’에 직접 관여했고 80위원회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와 보안사 등이 참여해 5·18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왜곡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문화공보부(문공부) 해외공보관실은 ‘광주사태진상 해외홍보책자 발간계획 보고’라는 제목의 문건을 통해  국방장관이 같은 해 6월 초 국회 국방위원회에 보고한 “5·18 직전 북한군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을 받았다.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기관총 등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한 내용을 담았다. 이 계획은 전두환에게 보고되었다(경향신문 2020년 4월23일).

신군부는 1천 여 명에 달하는 80년 해직언론인이 집단 저항을 하지 못하도록 구심점을 파괴하는 공작을 벌였다. 이는 동아, 조선 투위가 동일한 사유로 해직되자 단일 대오를 형성해 민주화 투쟁을 벌인 것을 보고 80년 저항언론인들을 와해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신군부는 광주항쟁기간 동안 신군부에 항거한 언론인 가운데 가장 격렬히 투쟁한 언론인 29명은 국시부정, 반정부자라는 혐의를 기재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영구취업제한조치를 취해 생존권을 위협하는 폭거를 저지르는 등 7백 여 명의 해직언론인에 대해서도 6개월~1년 취업제한 조치를 취했다. 신군부는 언론사 통폐합도 법률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법적 제소 등에 대비했다. 이런 사실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 10월 발표한 80년 불법 해직 진상 규명 결과에서 아래와 같이 드러났다.

<자료> 1980년 신군부가 작성한 80년 투쟁언론인에 대한 취업제한 및 동향파악 블랙리스트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 10월 25일 발표한 군부 언론통제 사건 조사결과 발표자료 49~52쪽)

가. 해직언론인 취업제한 조치

보안사는 강제 해직된 언론인의 취업을 제한하기 위하여 ‘총무처 비위관련 공직자 취업제한 기준에 준하여 형평을 유지하기 위한 취업제한’이라는 명분으로 「정화언론인 취업허용 제한기준」을 만들었다. 해직언론인은 공무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총무처 비위관계 공직자 취업제한 규정을 적용하였고, 언론사 및 관계단체, 공무원, 국영업체, 정부투자 및 출자법인과 단체에 취업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사기업의 홍보 및 광고 담당 요원까지를 해직언론인의 취업을 제한하였다. 사건기록철 제2권 제249쪽, 2처, 「정화언론인 취업허용 제한기준」.

위 문서에 의한 취업 제한기간 및 ‘국시부정 및 반정부’를 이유로 한 영구 취업불허자는 다음과 같다.

▲ 취업제한기간. 표=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 취업제한기간. 표=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 취업불허명단. 표=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 취업불허명단. 표=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이후 보안사는 1980년 9월15일 정화언론인 711명 중 국시부정 및 극렬 반정부자 28명을 제외한 인원에 대하여 1차 순화시킨 후, 타업종 취업을 허용할 수 있도록 노태우 사령관에게 건의하여 결재를 받았고(사건기록철 제2권 제268쪽, 2처,「정화언론인 타업종 취업허용건의」, 1980년 9월15일), 같은 달 30일 13명을 영구취업제한하고 나머지 인원은 취업을 허용할 수 있도록 아래와 같은 분류기준으로 다시 결재를 받았다(사건기록철 제2권 제155쪽, 「정화언론인 취업허용건의」, 1980년 9월30일).

▲ 표=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 표=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보안사의 위 9월30일자 「정화언론인 취업허용건의」에서는 취업을 허용할 경우 장점으로 급수에 따라 반성개전의 정이 있는 자에 대하여 국가발전에 기여 기회 부여할 수 있고, 비위공직자와 동일조건으로 취업요건을 완화함으로써 신분상 공무원과 준한다는 의식을 심어주고, 형평성을 유지하며, 반성자에게 취업기회를 부여하여 불평불만자의 집단화를 방지할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허용업종 취업자는 퇴직사의 재직증명발급 시 자연스럽게 각서 받고 이를 문공부에 제출케 하여 간접적으로 순화효과를 기하고 취업허용을 구실로 다시 한번 언론인들을 정부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였다.

한편, 80년 7월1일 이후 언론정화조치대상자에 포함된 자 및 정화조치대상자에서 제외되었거나 누락된 자로서 입건, 수사 또는 재판에 계류 중인 자와 수사종결(기소유예처분) 또는 형이 확정된 자에 대해서도 추가적으로 취업이 제한되는 조치를 취하였다(사건기록철 제2권 제224쪽, 「범법(소추) 언론인 취업제한조치 건의」). 그 내용은 표와 같다.

▲ 대상자별 조치기준. 표=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 대상자별 조치기준. 표=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언론인들의 취업제한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이는 문공부에서 1980년 9월경 작성한 「정화 언론인 취업문제」라는 문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사건기록철 제9권 제1987쪽, 문화공보부, 「정화언론인 취업문제」 1980년 9월10일).

문공부는 해직 언론인에 대한 취업을 제한할 시

- 대부분이 의식분자이며, 부유하지 않은 실정으로 제작시 반정부 불평 집단화할 것임
- 동아, 조선 투위와 같이 집단행동을 벌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안정되고 있는 기존 언론인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며, 내외 언론에 부정적 요인이 될 것임
- 소수의 반체제 분자 이외 언론 이외 분야의 취업을 막아야 할 이유와 명분이 희박함
이와 같이 분석하고, 다음과 같은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가. 소수의 악질적인 반정부 반체제 분자 이외의 해임자들에 대해서는 언론 이외 타 분야의 취업을 허용함
나. 단 취업자에 대하여는 향후 반시국적 언동을 하지 않음은 물론 새시대의 국가건설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겠다는 각서를 징구함. 퇴직 언론사에서 재직증명 발급시, 각서 징구 문공부에 제출
다. 취업허용방침은 언론인 등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알려지도록 함 (현재 각 기업체는 정부방침을 몰라 취업 기피 경향)

1980년 신군부에게 저항해 불법 해직된 투쟁언론인들은 1984년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를 만들어 민주언론시민연합 창립, 말지 발행 등을 통해 전두환 정권에 투쟁했으며 90대 이후 수차례에 걸쳐 80년 해직언론인 배상 또는 보상 특별법이 발의되도록 노력했고 2005년부터 매년 광주항쟁기간 동안 5·18재단의 지원 등을 받으며 광주 현지에서 언론세미나 등을 개최해 왔다. 그러면서 광주항쟁에 언론투쟁이 포함되는 것이 역사바로잡기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국회에 여러 번의 특별법이 제기되도록 노력했고 광주항쟁 행사에 동참하면서 ‘광주의 전국화’가 당위라는 것을 실천했다.

80년 해직언론인 가운데 근거 없이, 법적 절차 등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불명예스런 명목으로 신군부의 블랙리스트에 기재된 분들은 심적 고통은 엄청나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배상 등의 조치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또한 신군부가 언론사통폐합을 강요하면서 거리로 나앉아야 했던 언론인 3백 여 명도 전두환 일당의 정권찬탈 과정에서 빚어진 범죄행각의 일부라는 점에서 합당한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이다.

80년 언론투쟁에 대한 언론과 법원, 과거사위 문 대통령의 자리매김

한국기자협회는 지난 2006년, 1980년 언론인 투쟁이 시작된 날인 5월20일을 기자의 날로 선포하면서 언론계에서는 20여 년 만에 언론의 역사바로잡기가 이뤄졌었다. 기자협회가 80년 언론인 투쟁을 기자의 날로 기리려 한 것은 해방이후 무수히 진행된 언론 투쟁에 대한 상징성과 그 의미에 대한 심도 깊은 조사결과 80년 언론인 투쟁이 한국 언론 정사에 가장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살인마로 지칭되던 전두환이 내란과정에서 언론 대학살을 자행한 것은 광주항쟁 기간 동안 그가 전국적 언론 투쟁에 얼마나 경악했는지를 반증한다. 1980년 언론투쟁은 광주항쟁기간 동안 언론인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한 것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내란죄 등에 대한  5·17, 5·18 관련사건 대법원 판결에서 확인된 바 있다.

① 5·17, 5·18 내란죄 사건 1, 2심 공소장과 판결문 내용

80년 언론인 학살의 진상은 문민정부 들어 전두환, 노태우의 내란죄 수사를 담당한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가 1996년 1월24일 전두환, 정호용 등 11명의 내란수괴에 대한 혐의사실을 발표하면서 드러났다. 「5·17, 5·18 관련 사건 공소장」에서 80년 언론인 대량 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집권계획 일환으로 자행된 내란의 주요 과정이었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검찰이 언론학살을 자행한 범죄인으로 지목한 사람은 전두환, 노태우, 허삼수, 허화평 등 4명이다.

전두환·노태우 등의 내란죄에 대한 1996년 8월26일의 1심 및 그 해 12월17일의 2심 판결문에서 80년 언론학살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내란 과정에서 이뤄진 불법 행위라는 것이 밝혀졌다. 검찰의 언론학살 수사결과는 1, 2심 재판을 통해 대부분 사실로 인정되었고, 전·노씨가 상고를 포기함에 따라 항소심 판결문에 적시된 범죄 사실은 최종적인 사법적 판단이 되었다. 공소장과 판결문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 전두환은 1980년 6월경 허문도 문교공보분과위원 등이 언론사 통폐합 방안, 언론인 정화계획, 언론관계법 제정 등을 내용으로 작성한 ‘언론계의 정화-정비계획’을 보고받고 그 전면 시행은 보류한 상태에서 문교공보분과위원회를 통해 ‘언론계 자체 정화계획’을 수립하게 하여 1980년 7월 24일경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전달되도록 하고 1980년 7월 30일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언론 자율정화 및 언론인 자질 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하게 하여 자율정화 형식을 취한 후 7월말경 이상재 언론대책반장이 작성한 보도검열 비협조자 등 언론계 해직 대상자 336명의 명단을 이광표 장관을 통해 해당 언론사에 통보, 각 언론사에서 대상자들의 사직을 종용하여 이들을 포함한 933명이 1980년 10월까지 소속 언론사들로부터 해직하게 하고….”

“1980년 10월 초순경 보안사 이상재 언론대책반장이 허문도 정무제1비서관의 검토자료를 토대로 자율 결정의 형식에 의한 언론통폐합을 내용으로 하는 ‘언론 건전육성 종합방안 보고서’를 작성하자 피고인 전두환·노태우는 허화평·허삼수와 함께 10월 중순경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김경원 비서실장,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 우병규 정무제1수석비서관, 이웅희 공보수석비서관, 허문도 정무제1비서관이 참석한 가운데 권정달로부터 이를 보고받았으나 김경원 비서실장, 이웅희 공보수석비서관들의 반대로 그 추진을 보류하였다가, 그 무렵 허화평·허삼수는 다시 허문도로부터 언론통폐합의 필요성에 대해 수차례 설명을 듣고 이에 동조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그 실행을 결심하여 허문도로 하여금 ‘언론 창달계획’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만들게 한 다음 11월 12일 이광표 장관이 문화공보부의 결재안으로 가져오자 이를 결재하여 피고인 노태우에게 전달하게 하고, 그 집행을 의뢰받은 피고인 노태우는 16시경 한용원 정보처장과 김충우 대공처장에게 언론사 사주들을 불러 신속히 처리하되 그 집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여 18시경 중앙 언론사 사주들은 보안사 대공처가, 지방 언론사 사주들은 정보처 주관하에 지방의 각 지역보안부대가 소환하여 통폐합 조치에 이의가 없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고 이에 따라 지방지를 1도1사 원칙에 따라 10개로 통합하고 공·민영 방송구조를 공영방송 체제로 개편하는 등 신문 28개, 방송 29개, 통신 7개 등 64개 매체를 신문 14개, 방송 3개, 통신 1개 등 18개 매체로 통폐합하고 이 과정에서 305명의 언론인이 추가로 해직되도록 하면서 이를 자율 추진 형식으로 하기 위해 허문도·이수정 비서관으로 하여금 자율 결의문과 홍보문을 작성하게 하여 이를 허만일 문화공보부 공보국장에게 전달, 11월 14일 신문협회로 하여금 ‘건전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를 하게 하는 등 일방적으로 언론기관 통폐합 방안을 마련한 후 군 정보수사기관을 동원해 이를 실행하고….”

▲ 1988년 국회 문공위 언론 청문회에 출석했던 허문도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 ⓒ 연합뉴스
▲ 1988년 국회 문공위 언론 청문회에 출석했던 허문도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 ⓒ 연합뉴스

② 대법원 판결 내용

신군부의 80년 언론폭거에 대한 역사적 범죄 사실은 1997년 4월17일 전두환, 노태우와 관련한12.12와 5·18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을 통해 역사적 범죄로 확정되었다. 12·12와 5·18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전두환은 국군 보안사령관으로서, 1980년 허문도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위원 등이 언론사 강제해직, 언론사 통폐합 등을 내용으로 작성한 ‘언론계의 정화, 정비계획’을 보고 받는다. 전두환은 이어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위를 통해 ‘언론계 자율정화계획’을 수립케 해 같은 해 7월 이광표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전달되도록 했다. 이어 같은 해 7월30일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언론자율 정화 및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케 하여 자율정화 형식을 취한다. 그 뒤 이상재 당시 보안사 언론대책반장이 작성한 보도검열 비협조자 등 언론계 해직대상자 336명의 명단을 이광표 장관을 통해 해당 언론사에 통보, 각 언론사에서 해직대상 언론인들의 사직을 종용해 10월까지 소속 언론사로부터 해직되게 했다.

③ 과거사 진상규명위와 문 대통령 등의 80년 투쟁 확인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10년 신군부의 1980년 언론 학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해 발표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광주항쟁 기념사에서 80년 해직언론인 문제를 언급하면서 그 실체적 진실과 역사바로잡기를 강조한 바 있다. 그러다가 민형배 더불어 민주당 의원이 광주항쟁 특별법 적용 대상에 1980년 언론투쟁을 포함시키는 특별법을 2020년 7월 국회에 대표 발의해 이 법안이 2021년 4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소위를 통과했다.

한국기자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PD연합회, 방송기자협회, 자유언론실천재단 등은 2019년 3월과 2020년 5월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80년 언론인 투쟁의 역사적 사실이 포함되어 언론 역사가 바로잡힐 수 있도록 하고 이들 언론인에 대한 배상법이 시급히 국회를 통과할 것도 강력히 촉구했었다(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911).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2020년 두 차례의 5·18민주화운동 기념사를 통해 1980년 전국 언론인들이 광주항쟁기간 동안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검열, 제작거부투쟁을 벌인 것에 대해 진상 규명, 역사 바로 잡기 등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5·18 민주화운동 제37주년 기념사에서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와 함께 “수많은 젊음들이 5월 영령의 넋을 위로하며 자신을 던졌습니다.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중략) 진실을 밝히려던 많은 언론인과 지식인들도 강제해직되고 투옥 당했습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이 광주항쟁과 관련해 투쟁한 수많은 젊은이의 투쟁, 언론인 및 지식인의 해직과 투옥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언론을 포함한 사회 민주화 운동의 진상 규명과 역사바로잡기를 강조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2020년 5월 18일 제40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경찰관뿐만 아니라 군인, 해직 기자 같은 다양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문재인 대통령은 축전을 보내 기자의 날을 축하했다.

또한 문 대통령은 한국기자협회가 2021년 5월20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제16회 ‘기자의 날’ 기념식에 보낸 축전을 통해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위해 청춘을 바친 원로 언론인들께 존경의 말씀을 드리며 취재 현장과 편집국에서 땀 흘리고 계신 모든 언론인의 노고에 감사드린다”며 “언론 뒤에 따라올 수 있는 단어는 오직 자유다. 독재와 검열 언론 통제에 맞선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의 사직서 제출과 한국기자협회의 검열거부라는 용기있는 행동이 있었기에 오월의 진실은 광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민주주의가 성숙해지고, 언론 환경이 혁명적으로 변했다. 더욱 투철한 기자 정신과 보다 균형 있고 조화로운 언론의 역할이 강조되는 시대”라며 “우리 언론이 시대의 정신을 깨우고, 흔들림 없이 진실만을 전하며 항상 국민과 함께해 주실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2020년 5월20일 제15회 ‘기자의 날’ 기념식에 보낸 축전을 통해 "40년 전, 80년 5월 기자들은 독재와 검열에 맞서 제작 거부를 불사했다. 진실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돼주었다. 기자들은 체포돼 모진 수난을 당하고 언론사는 문을 닫아야 했지만 기자협회와 기자들의 투쟁은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 밀알이 됐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여러분의 노고 덕분에 우리 민주주의를 새로운 장을 열었고, 또 열어가고 있다”며 “기자의 양심에 기반한 진실한 보도를 위해 항상 노력해주신 여러분께서 더 크고 넓은 ‘언론 자유의 시대’를 만드는 데 앞장서주시리라 믿는다”고 당부했다. 기자의 날은 1980년 5월20일 기자들이 전두환 군사정권의 언론 검열에 맞서 검열·제작 거부에 들어간 날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6년 제정됐다.

이상에서와 같이 1980년 언론투쟁에 대한 자리매김이 이뤄진 것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언론 탄압을 상징하는 75년 동아· 조선 투쟁 등 해방이후 전개된 언론 민주화투쟁 등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과 원상회복이 시급히 취해져야 한다. 언론 투쟁역사의 정상화가 전체 사회의 비정상을 정상화하는데 첫 단추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국회는 시대의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입법 행동에 나서야 할 것이다.

광주 항쟁과 미국 – 미국의 연이은 한국 군사 쿠데타 승인

미국은 한국에서 박정희, 전두환 등의 정치군인들이 두 차례에 걸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는 것을 승인해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짓을 저질렀다. 미국은 2차 대전을 전후 해 사회주의 세력인 소련, 중국 견제를 위한 극동전략을 추진했으며 한반도 전쟁 참전 등은 그런 목적을 위한 파병이었다. 한국에서 두 차례 발생한 군 쿠데타는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평시와 전시 작전지휘권을 행사해 한국의 군사주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발생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대표적인 정치군인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한국군이 실질적인 한반도 전쟁 억지력이 아니라 미국이 그것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이 보장될 경우 한국군의 정치 참여를 사후 승인해 기정사실화 했다.

미국은 1961년 5월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발생 나흘 만에 승인했다. 당시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미국의 승인을 받고 싶어 하자 5월20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한미 두 나라사이의 우호관계는 확고하다는 메시지를 쿠데타세력이 정부를 전복하고 그들의 통치기구로 만들어 놓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보냈다. 동시에 주한미군사령관은 쿠데타 지도자들이 동원한 군부대를 원상복귀 시킬 것을 촉구했다. 박정희는 미국이 쿠데타에 대해 지지하자 5월27일 쿠데타 당일 선포했던 계엄령을 해제했다(https://en.wikipedia.org/wiki/May_16_coup#United_States_response).

6월24일 주한 미 대사 사무엘 버거가 서울에서 박정희를 만나 미국은 박정희 정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단지 박정희가 숙청과 불법 체포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7월27일 미국무부 딘 러스크 장관은 미국이 한국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정부를 승인한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부정선거에 항의해 발생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제 2공화국이 발족한 뒤 이승만의 13년간 독재로 누적된 사회적 모순이 분출해 외견상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혁명 뒤 민주화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는데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4·19 혁명의 의미를 짓밟았다. 미국이 민주주의에 역행한 쿠데타를 승인한 것은 한국의 민주화 보다 미국의 이익을 우선한 것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만약 박정희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한국은 이승만 독재와 친일 적폐 등을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인데 미국은 친미 세력이 포진해 있는 군부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는 것이 미국에 더 이익이 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정은 쿠데타 발생 나흘 만에 케네디 대통령이 서둘러 쿠데타를 승인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의 속셈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라 하겠다.

신군부의 광주 학살과 글라이스틴 미 대사

미국은 1979년 전두환 일당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주한 미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이 국무부에 전통을 보내 군의 소장파 젊은 난폭자들이 기존 지휘부로부터 권력을 쟁탈해 군 내부에서 추후 싸움이 더 벌어질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고 타전했다. 당시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정승화 장군을 박정희 암살범으로 체포하고 군 최고 지휘관으로 행세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을 비밀리에 만난 뒤 본국에 또 비밀 전문을 보냈다(UPI 2020년 5월15일 https://www.upi.com/Top_News/World-News/2020/05/15/US-faced-tricky-choices-following-South-Korea-coup-documents-show/1021589548521/?ur3=1).

“전두환은 쿠데타를 미리 음모했다는 증거를 감추려 하고 있다. 전두환의 반대 세력이 반격을 가해 양측의 충돌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쿠데타가 발생한 현 상황은 북한의 도발 위험이 높아지고 있어 우려된다. 전두환과 그 일당은 미국의 지원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 미국은 한국군 내부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하는데 향후 수주 또는 수 개월 안에 극도로 예민한 선택을 해야 할 처지가 될 수도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80년 5월17일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확대하기 전에 전두환의 보좌관을 만났으며 그 때 그 보좌관은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 군은 정부 기관을 완전 장악했다.”

1980년 5월18일부터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 연행했다. 광주항쟁이 발생하자 미국 카터 대통령은 1979년 발생한 이란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카터 행정부는 광주항쟁이 발생한 뒤 전두환 일당에게 군이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것에 동의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부의 비밀 문건의 내용은 대부분 한국에서 군부 독재에 대한 반대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https://popularresistance.org/qwang-ju-democracy-protest-and-massacre-us-was-complicit-in/).

글라이스틴 대사는 1980년 5월8일 전두환을 만나 미국은 군이 법과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양해하고 있으나 평화적 시위에 대해서는 과도한 진압을 삼가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비밀이 해제된 미 정부 자료에 따르면 미 국방부와 국무부는 5월18일 이전 전두환이 특전사 부대를 광주와 다른 지역에 배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5월22일 백악관에서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광주 항쟁은 군에 의해 제압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 회의 5일 뒤 계엄군은 광주로 진입해 전남 도청을 사수하던 시위대를 사살했다.

▲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 ⓒ 연합뉴스
▲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 ⓒ 연합뉴스

한편 지난 2020년 5월 ‘5·18 증언회’에서 김용장 전 미군 501정보단 요원이 “5·18민주화운동 10일간의 항쟁기간 동안 40여건의 보고서를 썼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사살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해 충격을 준 바 있다(광주드림 2019년 5월20일).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미군이 광주항쟁 기간 동안 활발한 정보활동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조속히 정상 가동되어 새롭게 제기된 여러 문제들을 포함한 진상규명에 나서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현재까지 드러난 여러 정황을 보면, 5·18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은 미국의 개입 여부에 대한 사실 확인이 되어야 그 전모가 드러날 것이란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지금껏 공식적으로 5·18 민주화운동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부기구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규명한 적은 없다. 최근 일부 국회의원이 미국에 관련 정보 제공을 요청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미국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었고,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2018년 9월 전남대학교를 방문했을 전남대 총학생회 집행부 등 학생 10여명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 학살 책임이 미국 정부에 있다며 해리스 대사 방문을 반대했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관련 자료는 미국이 광주학살을 묵인한 방조자가 아니라, 명백히 책임이 있는 공모자로 5·17쿠데타를 용인했고 공수특전단의 광주 및 주요도시 출동을 승인했으며, 한국군의 학살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있다. 예를 들어 1980년 당시 주한 미대사 글라이스틴이 작성한 외교전문에 따르면 미국과 신군부는 1980년 5월 무렵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격화될 경우 이들 특수부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문제에 대해서 긴밀하게 조율했으며, 신군부는 시위 진압을 목적으로 이동하는 부대의 동향을 한미연합사에 상세히 보고하고 있었고 상호간에 긴밀한 조율했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자, 5월22일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한미연합사 소속의 한국군 20사단의 네 개 연대를 ‘폭동진압(Riot Control)’용으로 허용해 달라는 신군부의 요청을 승인해주었으며, 데프콘3 수준의 경계태세를 발동해 신군부의 광주 진압을 전후방에서 지원해주었다. 또한 미국은 보수정권인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 후 첫 방미인사로 전두환을 초청함으로써, 신군부 정권이 국제적인 정당성을 얻게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미국은 2차 대전 종전후 점령군으로 남한에 진주한 뒤 친일세력을 해방정국의 지배세력으로 만들면서 제주 4·3 항쟁과 6·25 한국 전쟁 당시 민간인 대량 학살, 5·16군사쿠데타 등에 직간접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있지만 그에 대한 진상 규명 등은 한미동맹의 유지라는 구실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미동맹은 미국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군사적 주권이 실질적으로 미군에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어 이의 정상화가 시급하고 그래야 광주항쟁 등의 진상 규명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결론에 대신해서-광주 항쟁 41년 뒤 한국 언론의 당면 과제

5·18 민주화운동 정신은 민주, 인권, 평화로 압축할 수 있는데 이의 완성은 한국의 민주주의 선진국과 평화통일을 의미한다. 오늘의 언론은 5·18 민주화운동 정신이 현실 속에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80년 언론투쟁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5·18 민주화운동 정신은 그 완성까지 갈 길이 멀다. 민주의 경우 국가보안법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고 인권은 사회적 소수자와 비정규직 등이 부당한 처우를 당하지 않도록 평등법이 통과되어야 한다. 평화는 궁극적으로 남북평화통일의 달성에 의해 실현될 것인데 이 부분도 완성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2021년 5월 초 현재 미중패권경쟁 등으로 한반도 정세가 불안해지고 미국의 대북 정책에 북한이 정면 반발하는 사태 등으로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특히 미국이 한국의 군사주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가 21세기 들어서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2016년에도 한국군의 정치 개입 음모가 진행됐던 것으로 폭로되기도 했다. 지난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전국이 촛불로 뒤덮이고 탄핵 심판 절차가 진행될 때 군이 일종의 계엄령인 위수령 선포 및 군대 투입을 검토했다는 정황 문건이 공개됐다(한국뉴스투데이 2019년 10월23일).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2021년 4월26일자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직전에 기무사령관에게 계엄령 검토를 지시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군의 정치 개입 차단은 불평등한 한미동맹관계을 정상화 시키고 한국군이 국방을 전담하는 상황이 될 때 가능할 것이다. 국제적으로 수치스런 군사주권 문제의 정상화를 위해 정치권, 학계, 언론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언론은 국보법의 통제를 일상적으로 받고 있는 상황이라서 한미군사관계에 대한 보도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등 진정한 의미의 민주와 인권 두 분야에서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불평등한 한미동맹관계가 국격을 해치고 자주권을 심각하게 제약하는 국치라는 점, 진보언론조차 한미관계와 국보법 폐해에 대해 무감각해진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국내 언론이 처한 환경을 살필 때 그것은 심각한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대다. 특히 정권교체가 반복되면서 우여곡절을 겪지만 민주주의 공간이 확대되는 추세여서 과거 독재정권 시절부터 그늘에 가려졌던 부분들이 공론화되고 있다.

이런 점을 진보언론이 정확히 인식하고 정략적 이익에 매몰되기 쉬운 정치권을 경고하고 선도하는 위치를 고수하면서 사회 전체의 선구자 역할을 하는 길을 찾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진보 언론이 보수언론보다 보도 영역을 확대해 양적 질적인 면에서 공론화, 의제 설정에서 우위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진보와 보수의 차별성을 확실히 하게 되어 지금처럼  기자실에 얽힌 문제로 갈등하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오늘날 언론 환경은 급변하고 있고 이에 대한 객관적 상황 인식이 절실하다. 한국의 국력이, 경제력은 세계 12-13위권이고 군사력은 세계 6위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했다고는 하나 그 외에 매년 국방예산도 남측이 북측에 비해 수십 배가 되는 상황이다. 미국의 군사적 종속이나 예속이 심화된 상태를 어떻게 정상화할지 남북의 평화적 교류협력과 통일은 어떤 방식이 될 것인지 등에 대한 전 방위적인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진보언론이 한때 한미동맹, 국보법 문제를 다루다가 시장에서 반응이 부정적이어서 중단했는데 오늘날은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 주력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정밀한 시장 점검이 필요하다.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와 안전에 기여하는 언론의 역할을 자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건전한 보수와 진보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미래 청사진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해야 하고 그것이 사회 발전에 필수적이다. 기자실 문제는 언론이 국민에게 알릴 의무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되는 것이 필요하다. 진보언론은 바람직한 미래를 지향하는 보도를 하면서 보수언론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여건 확보에 힘써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적 여건을 고려할 때 진보언론은 보수, 수구언론과 공유하고 있는 안보 통일 분야의 냉전적 보도 프레임에서 시급히 벗어나야 한다. 전체 언론이 외면하는 공간이 한반도 평화통일과 동북아 평화 안정에 역행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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