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 말은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4년 동안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장애인의 삶에서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된 기회는 없었고, 공정한 과정 또한 없었으며, 정의로운 결과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자퇴했습니다. 이유는 장애인 차별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라는 꿈을 가지게 된 것은 목사는 예수의 행동을 삶으로 살아내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삶은 소수자와 연대하는 삶, 빼앗긴 권리를 ‘되찾을 때’까지 투쟁하는 삶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고, 끝내 자퇴했습니다. 누구보다 저는 목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학교에서 제시한 정규 커리큘럼을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규 커리큘럼은 너무나도 비장애인 중심적이었고, 교회 내에서도 비장애인 중심이라서 저는 갈 곳을 잃었습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지난 2월10일 오후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에서 서울역까지 승하차를 반복하며 중증장애인들의 지하철 타기 직접 행동을 진행했다. 사진=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지난 2월10일 오후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에서 서울역까지 승하차를 반복하며 중증장애인들의 지하철 타기 직접 행동을 진행했다. 사진=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저는 정규 커리큘럼에 하나인 목회실습이라는 수업을 이수하기 위해서 12곳 교회에 전도사로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축구부가 있어서, 또는 운전을 해야 해서,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등 여러 이유로 저를 거부했습니다.

또한 공간권에 대한 문제입니다. 즉 기숙사입니다. 기숙사라는 곳은 단순히 숙박시설이 아니라, 삶을 공유하는 공간, 더 나아가 ‘연대의 공간’입니다. 수업 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기숙사를 들어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진입로에 계단이 있었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휠체어를 탄 저는 아예 ‘출입 불가’였습니다.

이러한 최소한의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 곳에서 저는 더 이상 저의 삶을 사는 게 불가능해서 자퇴했습니다. 이는 분명한 장애인 차별입니다.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고,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7년 동안 꿈꿔온 목사라는 저의 꿈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짓밟히고, 저의 노력은 노력이 아닌 것처럼 됐습니다. 과연 제가 한 노력은 노력이 아닐까요? 저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주의 공정성’이 바탕에 깔린다면, 장애인을 더욱 장애인으로 만드는 세상에서 장애인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공정한, 평등한 기회조차 빼앗겨버렸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은 기본권에 대한 것들을 침해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동권, 노동권 등 많은 기본권을 장애인들은 누리지 못합니다. 이동권은 누구나 안전하게 이동을 하는 권리입니다. 정부는 2025년까지 서울시 저상버스 100% 도입을 약속했습니다. 현재 서울시 저상버스의 비율은 57%입니다. 올해까지 75% 도입을 해야 가능한 수치입니다.

하지만 올해 예산이 줄어들었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약속인가요. 또한 장애인 콜택시를 타려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다른 도시들은 이틀 전에 예약해야 하고, 오후 6시가 되면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장애인은 어떻게 이동을 하란 말입니까.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는 늘 장애인을 배제하고, 혐오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에게 공정, 평등, 정의는 평생 없었습니다.

▲지난 4월20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420장애인차별철폐 결의대회에서 장애인 예산 증액을 촉구하고 있다.사진=민중의소리
▲지난 4월20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420장애인차별철폐 결의대회에서 장애인 예산 증액을 촉구하고 있다.사진=민중의소리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몸이 능력주의 기본 값인 세상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의해 장애인은 노동할 수 없는 몸이 됐습니다. 스피드가 생명인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은 장애인에게 몸을 맞추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폭력이고 차별입니다. 몸을 맞추는 것이 아닌 다양한 몸에 맞는 노동을 보장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의해 장애인의 몸은 노동할 수 없는 몸이 됐습니다.

저는 장애인이자 청년입니다. 능력주의 공정성이 저의 꿈을 빼앗아갈 때도 청년이었고 지금도 청년입니다. 이 사회는 청년들한테 스펙을 강요하고, 능력을 키우라고 합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이죠. 그래서 저는 노력을 했고, 능력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비장애인중심 사회에서 말하는 능력주의에는 장애인은 없었습니다.

결국 능력주의 공정성은 장애인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비장애인 중심주의에 물든 이 사회가, 비정상/정상 이데올로기로 가득한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로 사람을 생산의 도구로만 보는 이 사회가 제 노력과 능력, 그리고 꿈을 앗아갔습니다. 이러한 불평등에 한 번이라도 사회는 장애인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으려 한 적 있습니까? 한 번이라도 관심을 가져본 적 있냐 말입니다.

▲청년·학생 시국선언 원탁회의가 지난 4월23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청년·학생 시국선언 원탁회의
▲청년·학생 시국선언 원탁회의가 지난 4월23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청년·학생 시국선언 원탁회의

이러한 능력주의 공정성에 반대하고 나 청년이자 장애인이자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유진우는 평등을 요구합니다. 능력주의 공정성이 옳다고 말하는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누구나 동등하게 지켜져야 할 권리가 보장되도록, 노동을 할 수 있도록, 이동을 할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이 되도록, 장애인도 탈시설을 하여 지역사회로 나와 권리가 보장되는 세상이 올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여 쟁취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평등이 무엇이고, 시대에 맞는 공정은 무엇이며, 자본주의 논리의 정의가 아닌, 청년들이 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귀담아 들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대남, 이대녀로 분리해서 논의의 방향성을 흐리지 말고, 정말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외침을, 고통을 귀담아 들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래야 평등한 기회가 올 것이고, 공정한 과정이 올 것이며, 정의로운 결과가 가시화되는 시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연재 순서>
① 우리는 왜 세대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하는가-김건수 (청년학생 시국선언 집행위원)
② 청년비정규직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시장의 불공정, 불평등-김태훈(한국지엠비정규직 청년노동자)
③ 능력주의는 장애인차별에 왜 무력한가-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센터 청년장애인)
④ 학력주의에 기반 한 공정담론이 청년의 이해를 대변 못하는 이유-김정래 (투명가방끈)
⑤ 공정담론은 여성의 안전한 삶과 평등한 일자리에 대안이 되지 못 하는가-안지완 (인천대 페미니즘 학생모임 젠장)
⑥ 공정이 아니라 불평등에 대한 싸움을 벌여야 할 때-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⑦ 정상성을 기준으로 한 능력주의는 차별을 막기 어렵다-한빛 (청소년트랜스젠더인권모임 튤립연대)
⑧ 시대의 위기를 바꾸기 위해 정치를 바꿔야-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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