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적 예능 포맷을 선보여온 김태호 PD가 이번엔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를 통한 실험에 나섰다. 현직 지상파 PD가 넷플릭스 시리즈를 연출한다는 소식에 방송가 안팎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넷플릭스는 지난 9일 “MBC 김태호 PD와 손잡고 예능 시리즈 ‘먹보와 털보’를 선보인다”고 밝혔다. “맛에 진심인 ‘먹보’ 비(정지훈)와 노는 것에 진심인 ‘털보’ 노홍철이 서로의 유일한 공통점인 바이크를 타고 전국의 맛과 멋, 멍까지 찾아 떠나는 좌충우돌 로드트립 버라이어티”라는 설명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이자 독점 콘텐츠로 제작되는 ‘먹보와 털보’는 MBC 채널에서 방영할 수 없다. MBC 편성 가능성을 전하는 일부 보도가 있었으나, 넷플릭스 측은 독점 공개라는 원칙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는 분위기다. MBC가 사실상 ‘제작사’ 역할을 하는 셈이다.

MBC는 13일 미디어오늘에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언제까지 하던 것만 할 수는 없다는 차원”에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MBC는 공영방송이기도 하지만 콘텐츠제작사이기도 하다. 여러 플랫폼에서 다양한 콘텐츠가 나오고 있어 여러 시도 중 하나로 진행하게 됐다”며 “프로젝트가 가져오게 될 성과와 교훈을 바탕으로 추후 진행 유무가 결정될 것 같다”는 설명이다.

▲김태호 MBC PD가 연출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먹보와 털보' 이미지 ⓒNetflix
▲김태호 MBC PD가 연출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먹보와 털보' 이미지 ⓒNetflix

일각에선 MBC의 선제적 판단보다 김태호PD가 적극적인 의사를 피력한 결과라는 해석도 따른다. 그간 김 PD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MBC 내부의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 역할을 강화하고 싶다고 밝혀왔다. 지난해 ‘놀면 뭐하니’와 관련해 진행된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2008년부터 그렸던 큰 그림이 ‘무한도전 스튜디오’였다”고 말했다. 무한도전에서 발생한 캐릭터와 에피소드가 다른 프로그램·채널에서 사용되는 걸 보며 “우리 능력 안에서 지상파가 아닌 플랫폼에 특화된 스핀오프를 만들 순 없을까 고민했다”는 것이다. 제작비의 한계, 리얼리티 기반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PPL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실제 ‘먹보와 털보’ 출연진인 방송인 노홍철은 ‘무한도전’ 원년멤버, 가수 비는 현재도 방영 중인 ‘놀면 뭐하니’에서 부캐 ‘비룡’으로 활약한 인물들이다. 두 프로그램을 함께 해온 최혜정 작가, ‘놀면 뭐하니’ 등에서 역시 김태호 PD와 호흡을 맞춰 온 이주원·장우성 PD까지 사실상 ‘김태호 사단’이 넷플릭스로 진출한 셈이다.

오늘날 지상파PD들의 답답함을 김태호 PD가 뚫어준 것과 마찬가지란 반응도 있다. 한 MBC 관계자는 “솔직한 말로 요즘 젊은 PD들은 넷플릭스와 협업이 꿈이다. 내가 만든 콘텐츠가 글로벌로 진출할 수 있고, 재원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고, 지상파 심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느냐”며 “젊은 PD들이 바라던 길을 김PD가 뚫어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엔 여러 함의가 담겨 있다. 더 이상 지상파 채널에만 PD를 묶어둘 수 없고, 이를 막으면 인력이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를 엿볼 수 있다. 이름이 알려진 ‘스타 PD’들은 줄줄이 지상파를 떠났다. 김태호 PD도 숱한 이적설의 주인공이었다. 지난해 박성제 사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김 PD의 넷플릭스 연출을 받아들인 이유로 “허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프로젝트를 권장한다. 그래야 제2의 김태호가 나온다”고 말한 것도 이런 현실을 반증한다.

▲김태호 MBC PD ⓒMBC
▲김태호 MBC PD ⓒMBC

이번 사례가 MBC라는 방송사의 새로운 활로를 실험할 계기가 될 거란 전망도 나온다. 플랫폼으로서 지상파 채널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3사(KBS·MBC·SBS)와 SKT가 합작한 OTT ‘웨이브’를 주된 콘텐츠 공급처로 활용하는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넷플릭스와의 관계를 고민하고 있지 않겠느냐는 분석이다.

한 OTT 업계 전문가는 “글로벌 방송사들은 기존의 광고 수익보다 직접적인 추가 매출로 이어질 수 있는 스튜디오 성격을 굉장히 강화하려 하고 있다”며 “MBC도 ‘예능 스튜디오’로서의 역량을 테스트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고 봤다.

일레로 영국 공영방송 BBC는 OTT 중심으로 전환된 시장에서 ‘BBC스튜디오’로 수익 다각화를 본격화했다. 2017년 이래 BBC스튜디오는 ‘닥터 후’ ‘이스트엔더스’ ‘스트릭틀리 컴 댄싱’ 등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제작해왔다. 영국의 타 채널 뿐 아니라 중국, 미국, 지난해엔 한국 MBC와 코로나19 다큐멘터리 공동제작에 나서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CJ ENM(스튜디오드래곤), JTBC(JTBC스튜디오), KBS(몬스터유니온), SBS(스튜디오S) 등이 스튜디오 자회사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번 실험이 어떤 성과를 낼지 예단하긴 어렵다. 이 전문가는 “콘텐츠를 만든다고 100%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고, 김태호PD 콘텐츠의 특성상 궤도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시의성이 중요하다”며 “넷플릭스가 그런 시의성을 가진 플랫폼은 아니다보니 실험을 하고 싶을 거고, MBC도 이런 게 통할 수 있을지 서로 테스트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

MBC 내부에선 이번 사례 외에도 넷플릭스 협업을 위한 논의가 일부 진행 중으로 알려졌다. 다만 그 빈도나 비중이 높아지진 않을 거란 전망이다. MBC 관계자는 “넷플릭스에서도 아무 콘텐츠에나 투자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플랫폼 대 플랫폼으로서의 컬래버레이션 단계에서 한두 개 정도 실험을 ‘맛보기’로 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가 전면화될 거라 보기엔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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