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카드제는 1971년 12월 13일 문공부장관이 신문협회, 통신협회, 편집인협회, 기자협회 등 언론단체에 보낸 공한과 이에 응답한 12월 17일자 한국신문협회의 회한(‘언론자율정화에 관한 결정사항’)을 통해 처음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윤장관은 공한발송에 그치지 않고 이튿날인 14일 각사 발행인들을 문공부로 초치, 사이비기자의 전국적인 실태를 브리핑하면서 프레스카드제도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이러한 프레스카드제는 국가가 기자의 자격을 실사, 허가하고 나아가 기자의 동태에 관한 제반사항을 파악하기 위한 장치로서 파시즘체제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기자통제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은 프레스카드제도의 실시에 대해 신문협회는 “기자의 취재활동에 있어서의 사회적 공신력을 높이는 것”으로 즉각 환영하고 17일자로 발표한 <언론자율에 관한 결정사항>에서는 이를 계기로 지방주재기자들의 다량 집단감원을 위한 지사·지국·보급소의 감축·조정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이 결정사항은 “한국신문협회 회원사 일동은 그동안 언론계의 자율적 정화와 경영의 합리화를 모색해 왔다”로 시작하면서, 지사·지국 등 판매망의 정비와 지방주재기자들의 대폭감축 및 프레스카드제의 실시 등을 골자로 하는 7개항을 나열하고 있다. 신문협회의 ‘자율결정’ 이후 여타 언론관계단체들도 각각 결의사항을 발표하고 프레스카드제를 실시할 것을 공약했다.

1972년 1월 1일부터 시행키로 했던 프레스카드제는 그 발급절차가 예상외로 까다로워 2월 10일에 가서야 비로소 일단락됐다. 이에따라 전국의 신문 통신 및 방송기자로서 프레스카드를 교부받은 기자수는 43개 일간신문에서 3천8백명, 7개 통신에서 4백61명, 49개 방송국에서 6백43명 등 모두 4천1백84명이었다.

프레스카드제 실시이후 지방주재기자의 대폭적인 집단해고 이외에도 이를 빙자로 한 기자집단해고사건이 경향 각지에서 속속 발생하여 그중에는 부당한 처분의 취소를 요구하는 법정투쟁으로까지 번지는 사례가 속출했다. 한편 프레스카드의 발급을 미끼로 기자들로부터 도리어 보증금을 받아 회사를 경영하고 전체 기자들에게 책·시험지·예술제회원권 등을 강매케 하거나 지방관공서로부터 기부행위를 강요했다는 혐의로 대구일보, 호남일보(군산) 등이 입건, 관련자가 구속되는가 하면, 사건경위를 조사한 신문협회 이사회는 양사에 대한 프레스카드 발급추전을 자진취소하고 문공부에 대해 그 회수를 의뢰(72년 3월 22일)함으로써 이 프레스카드제가 사실상 신문의 자동적 폐간을 가져올 수도 있게 하는 요소를 가졌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이때문에 대구일보는 자진폐간(72년 3월 30일)했고 호남일보는 그 추천취소의 철회를 요구, 법정투쟁을 벌였다.

프레스카드제의 실시는 무엇보다도 기자수의 대폭감축을 낳았다. 1972년에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은 언론인 수는 신문협회와 통신협회가 신청한 50개사의 3천5백41명, 민방협회가 신청한 4백34명, 문공부 소속 공무원인 KBS기자 2백9명 등 모두 4천1백84명이었다. 1971년 12월에 브리핑한 전국의 기자수가 7천90명이었으며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은 3천9백75명(KBS는 제외)과 카드를 발급하지 않기로 한 주간및 월간 등 잡지기자 8백28명을 제외하면 모두 2천2백87명이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지 못하고 기자직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이것은 불과 3개월동안 32.3%의 기자가 도태됐음을 가리킨다.

1973년 5월 문공부가 배포한 <보도증(프레스카드)소지자 명단>에는 3천8백29명이 게재되었다. 1972년의 엄청난 기자감축이 빚어진지 불과 1년만에 또다시 기자수가 3백55명이나 줄어든 것이다. 그동안 대구일보(42명), 호남일보(20명), 한국경제일보(21명), 대구경제신문(39명), 동아통신(75명) 등 5개사가 문을 닫는데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문공부가 정부 각 부처의 출입기자실과 출입기자수를 대폭 감축한 결과였다. 1975년 문공부가 인쇄배포한 <보도증소지자 명단>에는 다시 2천9백97명으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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