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준 국정원장과 국민의 대결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남재준을 선택했다. 증거를 조작하여 진실을 훼손하고 정의를 무너뜨리려한 국정원장에게 대통령은 또 다시 면죄부를 줬다. 통합과 국민행복을 부르짖었던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었던 지지자는 물론 일반 국민까지도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남재준은 자리를 연명하겠지만 그 모든 부담은 이제 박 대통령이 감당해야 한다.

청와대 윤창중 대변인 임명을 강행할 때도 여권내부의 반발을 박 대통령은 간단하게 제압했다. 윤 대변인은 세계를 놀라게 한 국제적 사건으로 대통령의 신뢰를 망신으로 보답했다. 막말과 비아냥을 일삼던 그런 인사를 임명한 대통령이 ‘그럴 줄 몰랐다’면 사람보는 눈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 ‘모래속의 진주’라며 해양수산부 장관에 윤진숙을 고집한 사람도 대통령이었다. 결국 ‘진주가 아닌 모래였을 뿐’이라는 야당의 비아냥속에 중도하차 시킬 수밖에 없었다. ‘인사가 만사’라고 했건만 대통령의 인사원칙과 기준은 무엇인지 의문이 나왔고 ‘소통은 불통’이라는 인식은 더욱 공고해졌다.

남 원장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으로 결국 사과했다. 사과의 형식과 내용도 문제지만 ‘자신은 아무 것도 몰랐다’는 무책임함에 대통령의 ‘한번 더 잘못하면 혼내주겠다’는 식의 따뜻한 호응과 용서가 국민을 더 분노케하고 있다.

   
▲ 15일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에서 남재준 국정원장이 대국민 사과발표를 하고 있다 ⓒ 노컷뉴스
 
박 대통령은 2014년 3월 10일 “검찰은 한 점 의혹도 남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하고 국정원은 검찰 조사에 적극 협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검찰이 한 점 의혹없이 수사했나? 국정원은 검찰조사에 협조했는가? 국민을 졸(卒)로 보던 불행한 전두환 군사정권 시대를 연상케 할 정도로 수사기관은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박근혜 정부에 우호적인 보도로 일관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동아일보조차 <남재준 국정원장, 지휘책임 지고 사퇴하라>(4월15일자)라는 사설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검찰은 대공수사국의 부국장(2급)과 대공수사국장(1급)을 불러 조사했으나 남 원장에 대해서는 서면조사도 하지 않았다. 검찰의 수사 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검찰이 국정원을 압수수색한 것은 도청사건, 댓글 사건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였으며 세 사건 중에서 국정원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동아일보조차 검찰의 수사의지를 의심했다. 한겨레, 경향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문화일보조차 <국정원 ‘비정상의 정상화’ 위해 南원장 問責해야> 사설(4월15일자) 제목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탈북자’와 ‘공무원’이 2중으로 연루된 간첩 사건이다. 국정원장이 챙기지 않았다면 ‘직무유기’, 몰랐다면 ‘무능’에 해당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수사 결과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라고 다잡았던 점에 비춰서도 남 원장 문책(問責)이 불가피해진 상황이다.“

주요 언론의 남 원장 문책은 국민 다수의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은 ‘수사결과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 잡을 것’이라고 했던 국민과의 약속을 거짓말로 만들고 있다.

국정원 3급 직원인 이 팀장이 검찰이 수사한 ‘의혹의 정점’이며, 지휘 계선 윗선인 수사단장-국장-차장과 남재준 원장은 증거 조작과 무관하고, 수사·기소를 담당한 검사들도 혐의가 없다는 것이다. 또 법적 책임과는 무관하게 서천호 2차장이 물러나고, 남 원장은 15일 대(對)국민 사과와 함께 수사 관행 혁신을 약속했다.

과연 이렇게 넘어가도 문제가 없을까. 이번 수사의 결과와 대통령의 대응행태는 많은 국민에게 실망과 좌절을 넘어 분노케 하고 있다.

가장 큰 손실은 신뢰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진실을 밝혀줄 검찰과 국정원 같은 수사기관에 대한 신뢰감 상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큰 손실이다. 증거를 조작해서까지 간첩을 만들려는 국정원, 그에 동조세력으로 전락, 하부조직처럼 움직인 검찰에 대한 실망감은 신뢰라는 귀중한 가치를 망각하게 했다. 신뢰와 약속의 이미지로 대통령에 오른 박 대통령에 대한 신뢰감 상실 또한 만만치않은 정치적 손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엘리트 집단이라는 국가중추조직의 요원들이 국민의 평균적, 상식적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정원의 증거조작에 대한 대통령의 철저한 수사 당부와 지시에 대해 상식이하의 수사과정과 결과가 나왔는데도 일개 간부의 ‘일탈행위’ 정도로 넘어가려는 의식은 평균이하다. 그런 과정을 보고받았을 대통령조차 자신의 과거 발언에 대한 해명없이 간단한 ‘사과’ 정도로 넘어가는 모습 역시 상식적이지 못하다. 국정원장의 3분짜리 사과형식과 내용 역시 상식을 초월한다.

가장 큰 심리적 손실은 국민을 존중하지 않는 국정원, 검찰, 대통령의 행태다. 정의가 무엇인지, 인권이 무엇인지 논할 필요조차없다. 거의 모든 언론이 국정원장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여론을 전달하지만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자는 대통령은 국민을 ‘졸(卒)’로 보는 것이아닌지 우려스럽다.

경향신문은 ‘표창원의 단도직입’ <남재준은 ‘한국의 모리아티’?>(4월15일)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압수사를 통해 확보한 가려씨의 자백에만 의존해 유씨를 간첩죄로 기소했던 국정원과 검찰은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하자 2006년 유씨의 북한 출입경 기록을 위조해 항소심 법정에 제출했다가 적발당했다. 그 뒤에도 조작 사실을 숨기려 거짓과 회유와 탈북자 이용 여론몰이와 자살극 등을 벌이다 최근에서야 백기를 들었다. 이 조직적 범죄가 남재준 모르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정말 몰랐다면, 그의 ‘무능’은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거짓과 회유, 강압수사 등 국정원에서 벌어진 온갖 불법행위에 대해 남 원장만 몰랐다는 검찰 수사에 대해 ‘그의 무능을 용서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이해와 배려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계속되는 것일까.

진실이 조작되고 정의가 희롱받는 세상을 만드는데 가장 큰 책임을 진 대통령과 국정원장의 납득하기 힘든 행보에 국민은 어떻게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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