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녕, 헤이즐>의 두 주인공, ‘헤이즐’(쉐일린 우들리)과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는 암에 걸린 사람들의 모임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 헤이즐의 남자친구 어거스터스는 평범한 가정출신인데 두 사람은 가정 형편뿐만 아니라 처지와 상황도 비슷하다. 암 때문에 헤이즐은 폐를 잃었고, 어거스터스는 다리를 잃었다.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보컬 ‘데이브’(애덤 리바인)와 싱어송라이터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는 가난한 뮤지션이었다. 그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크레타의 남자친구 데이브가 벼락 인기 가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회경제적 차이가 도드라지면서 서로 멀어졌다. 물론 남자가 변심했던 것. 이에 비해 한국 드라마를 보면 남자 주인공들은 재벌가의 사람이거나 부유한 잘 생긴 청년들이다.

MBC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에서 김미영(장나라)은 평범한 회사원, 이건(장혁)은 그룹의 후계자이자 사장이다. 현실에서는 잘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신분의 두 사람은 기막힌 인연 때문에 결혼과 임신, 이혼 그리고 재결합의 사랑을 경험한다. 사건과 플롯이 복잡하지만 가난하고 평범한 여성이 재벌가 남자와 벌이는 로맨스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SBS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장재열(조인성)은 인기추리소설 작가로 그 명성도 높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부자다. 또한 당대의 최고의 매력남이다. 심지어 지해수(공효진)가 사는 쉐어하우스도 소유하고 있을 정도다. 여성들이 최고로 선호하는 남성 가운데 한 명인 장재열과 지해수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지해수는 정신과 의사이기는 하지만 불감증이어서 육체적 접촉조차 꺼린다. 물론 지해수는 남성들이 좋아하는 외모와 성격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까칠하고 톡톡 쏘는 성격이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장재열은 빠진다. 이런 점은 장나라도 마찬가지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김미영(장나라)이 <괜찮아 사랑이야>의 지해수(공효진)와 다른 점이 있는데 한없이 여린 점을 그대로 노출한는 것이다. 반면 지해수는 그것을 방어기제를 통해 감출 뿐이다. 이건(장혁)도 김미영에 대해서 어느덧 빠져들기 시작한다. 

   
MBC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 ⓒMBC
 

SBS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과 MBC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이건은 모두 돈이 많고, 잘 생긴 점 외에도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은 집안대대로 이어오는 유전병, 그리고 장재열은 정신분열증을 지니고 있다. 멋지고 돈이 많은 남자들을 치명적인 질병을 지닌 캐릭터로 설정하는 것은 이들 드라마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부유하고 멋있는 남자들에게 창작자들은 치명적인 질병을 안겨주고,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왔다. 

   
SBS '괜찮아 사랑이야' ⓒSBS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극심한 폐소공포증(閉所恐怖症)의 주원(현빈)은 엘리베이터를 타지도 못하고 항상 계단을 이용한다. SBS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에서 차지헌(지성)은 알 수 없는 불안 증세와 공포심의 발작을 일으키는 공황장애로 고통을 받았다. 또한 KBS 드라마 <영광의 재인>에서 인우(이장우)는 투렛증후군(틱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재벌 2세들은 하나 같이 정신장애를 갖고 있었다. 정신 질병이나 장애만 등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MBC 드라마 <최고의 사랑>에서 독고 진(차승원)은 남몰래 심장병을 앓고 인공 심장을 달고 살았다. 구애정(공효진)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병을 밝혔고 그로 인해 그들의 사랑은 굳어진다. 이런 질병과 장애는 모두 여성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마음을 주거나 결정적으로 사랑의 인연을 맺는 전환점을 제공한다. 

과거 치명적인 질병은 여성들에게 주로 발병했고 주로 남성들의 헌신과 희생을 이끌어내는 기제였다. 하지만 최근 드라마는 남성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고 있다. 그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와 부유함에도 치명적인 질병을 비밀리에 안고 살아간다. 이를 아는 것은 오로지 여자주인공 뿐이다. 여자주인공은 치명적인 질병에 노출된 남자 주인공에게 연민과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이로써 여성 주인공은 질병을 안고 있는 남성들을 따뜻하게 감싸는 휴머니스트가 된다. 물론 그들은 휴머니즘을 넘어 열정과 헌신의 사랑을 불태우는 연인의 관계로 나아간다. 

겉으로 멋진 남성들의 속사정은 누구도 알 길이 없는데 갑자기 그 남성들의 숨겨진 질병의 고통은 극적인 사랑을 이끌어 내는 촉매제가 된다. 질병은 ‘케미’(미디어 속 남녀 주인공이 현실에서도 잘 어울리는 것을 상징하는 신조어)의 촉발자인 셈이다. 본래 치명적인 질병은 멜로의 중요한 장치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불가항력적인 질병 때문에 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은 슬픔을 극대화 한다. 그러나 최근의 질병은 이별보다는 결합의 매개 고리로 등장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최근 드라마들이 신데렐라 콤플렉스 드라마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장치로 ‘부자 남자’의 질병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평범한 여성이 보통 인연을  맺을 수 없는 남성들과 사랑을 이뤄가려면 현실적인 이유가 필요한 데, 마땅한 게 없다. 부자이면서 멋진 남성들은 성격으로나 웬만한 외모를 지닌 여성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 유명세를 얻은 ‘데이브’(애덤 리바인)는 아름다운 여자 친구를 차기까지 했다. 바로 이 빈틈을 치명적인 질병이나 장애가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남자의 육체적 하자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상쇄해주는 요인이 된다. 멋지고 부유하지만 사실 질병과 장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그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이가 바로 가난하고 평범한 여성이다. 남성은 그런 고통을 받아주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여성에게 더욱 사랑을 느낀다. 따라서 신분과 직업, 세계관의 격차는 단숨에 극복된다. 이런 로맨스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드라마들은 남성 주인공을 불치병이나 희귀병, 나아가 장애로 고통 받는 캐릭터로 설정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민 청년이나 소년은 불치병에 걸리지 않는다. 아니 서민 청년들은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이제 등장하지도 않는다. 특히 미니시리즈 같은 트랜드 드라마에서는 멸종하다시피 했다. JTBC <유나의 거리>에는 가난한 서민 청춘남녀가 등장하지만 올드 세대를 위한 헌사임을 떨칠 수 없다. 비현실적이고 낡은 주인공들의 직업군들이 이를 말해준다. 부유하고 잘 생긴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는 그 주인공이 장애와 질병을 갖고 있든 그렇지 않든 신데렐라 콤플렉스 신드롬을 자극하는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영화 '안녕, 헤이즐' 포스터.
 

영화 <안녕, 헤이즐>처럼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두 주인공들이 서로 공감, 공유하는 데에는 돈이 많거나 몸이 멋지거나 뭐 그런 외형적인 것이 전혀 없었다. 영화와 드라마를 비교할 수 없는지 몰라도 한국드라마는 그 정도가 좀 심하다. 더구나 SBS <괜찮아 사랑이야>는 ‘노희경 표’ 드라마다. 오소녀(이수경)와 이광수(박수광)가 주인공이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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