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권할 때 자주 이용되는 이론이 있다.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이다. 이론에 따르면 무작위의 기억은 주입된 지 20분이 지나면 40%, 하루가 지나면 70%가 사라진다. 정보 왜곡이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걸 극복하려면 반복과 반추가 중요하다. 이런 노력이 없으면 기억은 태생적으로 망각에 압도당하고 만다. 

수능 오류 파문을 지켜보면서 이 오래된 곡선이 떠올랐다. 교육기자에게 수능 시즌이 즐거울 때가 있었겠냐만, 올해는 유독 괴롭다. 시작은 정답 오류였다. 같은 문제가 2년 연속으로 터지다보니 여론의 분노를 샀다. 여기에 ‘물수능’ 논란과 EBS 연계율이 문제로 불거졌다. 문제점이야 개선돼야 한다. 하지만 두들기고 보자는 식의 문제제기는 상황을 더 꼬이게 만든다. 특히 인과관계의 구분이 확실해야 한다. 기억과 반추는 그래서 더 중요하다. 

오류의 원인부터 보자. 수능 출제를 열 번 가까이 해봤다는 한 교수의 기억을 빌린다. 수능을 한 달 여 앞두고 고립된 장소에 모인다. 각자 네댓 문항씩 출제하는데 열흘 정도 걸린다. 참고자료는 제한돼 있다. 반면 검토할 자료는 태산이다. 문제 자체의 오류는 물론 사설문제집과 같은 문제가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잠도 못 잘 정도로 빠듯하다. 출제위원과 검토위원 간 위계도 문제로 지적되나 핵심은 인력과 시간 부족이다. EBS 연계는 오히려 출제부담을 줄였다. 그러나 교재만 믿고 검토를 소홀히 했는지에 대해선 잘라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다음은 물수능 논란이다. 가채점 결과만 보면 만점자가 늘긴 했다. 그렇다면 적당한 변별력은 어느 수준인가? 2년 전 영역별 만점자 1% 방침이 나왔을 때 언론은 우려 일색이었다. 하지만 올 모의평가에선 만점자가 1%에 근접한 과목에 “상당히 변별력이 있다”고 평했다. 올 초 교육부 업무보고 브리핑에 간 기자의 기억은 이렇다.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영어를 쉽게 낸다고 하니 환영이 많았다. 문제가 된 건 변별력이 아니라 어떻게 난도를 낮출 거냐, 수학도 쉽게 내면 안 되냐는 거였다. 더구나 쉬운 수능과 전형 다양화는 정부의 꾸준한 약속이었다. 이걸 뒤집는 게 수험생 입장에선 쉬운 수능 자체보다 혼란스럽다. 

마지막으로 EBS 연계다. 연계와 수능 오류가 별개라는 건 이미 지적했다. 그러면 연계 정책이 고3 교실 파행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어떨까. 2003학년도에 수능을 치른 내 기억을 보탠다. 난 EBS 교재로 수업을 받아본 일이 없다. 그러나 고3 생활을 통틀어 교과서로 원리 수업을 받은 적도 없다. 책상은 메가스터디, 블랙박스, 신사고 같은 문제집이 메웠다. 내신 문제도 여기서 나왔다. 고3 교실의 정상화가 문제집 선택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데 있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멀쩡했던 교실이 EBS 연계 때문에 무너졌다는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학력고사 성격의 5다선지형 시험이 유지되는데, 누가 무슨 도구로 수업을 한들 창의성과 사고력에 방점을 찍을 수 있을까. 더구나 1~2점차에 당락이 갈리는 환경이다. 연계정책은 이를 완화하고, 문제은행으로 가는 과도기에서 격차해소와 사교육경감 같은 취지를 최대한 지키기 위해 고려된 장치다. 이 기억이 빠진 상태에선 문제점을 지적하긴 쉬워도, 당장 그 자리를 뭘로 메울 지는 쉽게 답을 낼 수 없을 것 같다. 

   

▲ 서현아 EBS 기자

 

 

나는 수능의 문제점이 출제방식이나 난이도 같은 각론이 아니라고 본다. 근본적으로 자격고사와 학력고사 사이의 모순된 정체성, 여전히 아이들을 소수점 단위 점수로 줄세우는 비교육적 입시환경이 문제 아닐까. 고치려면 기억이 중요하다. 보이는 문제에 모든 악을 몰아가기보다 각 현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파생됐는지 기억하고, 장기적으로 옳은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수능의 기로에서 언론 역할이 더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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