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내가 몸담은 월간 ‘신문과방송’의 연말 기획을 위해 언론계 전문가 50인의 생각을 이메일 인터뷰 형식으로 물었던 적이 있다. ‘한국 언론 재건축하기’란 주제로 우리 언론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태도나 관행이 무언지 물었는데, 세 번째로 많이 나온 답변이 ‘가르치려는 태도’였다(궁금해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굳이 설명하자면, 첫 번째로 많이 나온 답변은 정파성, 두 번째 답변은 포털 의존이었다). 언론이 특권 의식을 내려놓고, 무지한 독자를 가정하는 ‘가르쳐주겠다’식 보도는 지양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이 답변이 눈에
‘집단적 독백’이란 게 있다. 유아에게서 발견되는 특징인데, 말 그대로 각자 자기 얘기만 내뱉을 뿐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난 6살이야”라는 한 아이 말에 아이들은 “나는 엄마가 정말 좋아”라는 식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로 응대한다.이런 현상은 유아의 사고가 타인의 관점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대화를 타인과 함께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 마음을 해소하는 용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유아기적 특징은 성인에게서 나타나기도 한다. 불특정 다수가 모인 단톡방이라든지 인터넷 게시
덕분에 방송 출연을 했다. 라는 미디어비평 프로그램인데,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해답을 찾는 ‘솔루션 저널리즘’에 대한 방송을 준비하던 제작진이 마침 이 칼럼을 보고 내게 출연 제의를 한거다. 덕분에 큰 공부를 했다. 방송 준비 기간을 포함해 약 20일 동안 이 주제를 놓고 대학교수, 미디어 활동가와 함께 국내외 다양한 사례들을 조목조목 살펴봤으니… 방송 출연자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이 있었다. ‘솔루션 저널리즘’을 가장 잘 소화할 언론은 바로 ‘지역 언론’이란 것이다.“허구헌날 문제만 제기하지
한겨레가 발행하는 뉴스레터 H:730이 9월 말 휴간을 고한 지 두 달 만에 다시 돌아왔다. 즐겨 보던 뉴스레터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에 반가운 마음이 컸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들었다. 당시 H:730 휴간을 알리는 메일에 적힌 휴간 사유는 ‘인력 부족’이었다. H:730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독자들을 다시 찾아온 걸까. 뉴닉, 어피티 등 뉴스레터 기반 매체가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언론사에도 ‘남들이 하니까 나도’ 식의 뉴스레터 붐이 일었다. 뉴스레터란 시도까지는 좋았다. 미국에서는 뉴스레터 기반 플랫폼인 ‘서브스택’(Subst
“정부는 유류세 인하 방안을 검토한 바 없음을 알려드립니다.”10월15일, 기획재정부는 ‘정부가 유류세 인하를 검토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 이와 같은 해명자료를 냈다. 이미 몇몇 언론사가 정부 부처 관계자 입을 빌려 정부의 유류세 인하 검토를 기사로 전한 후였다. 기획재정부는 10월17일에도 동일한 해명자료를 배포하며 쐐기를 박았다. 언론은 ‘정부가 유류세 인하를 검토하지 않는다’는 기획재정부 입장을 그대로 받아 기사로 썼다. ‘정부의 유류세 인하 검토’를 썼던 여러 기사가 오보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결론적으로, 정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 그는 일찍이 두테르테 필리핀 정부가 지지자 결집과 선동을 위해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있음을 폭로한 바 있다.그에 따르면 두테르테 정책에 반대한 레일라 드 리마 상원의원은 소셜미디어에서 세 단계에 걸쳐 공격받았다. 두테르테 정부는 1단계로 허위 정보를 통해 드 리마 의원의 신뢰성을 무너뜨렸고, 2단계로 성적으로 공격했으며, 3단계로 드 리마 의원 체포를 청원하는 해시태그 운동을 선동했다. 소셜미디어가 초법적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가 되기도 했다. 두테르테 정부는
“나는 장기 말이 아니”라던 ‘오징어게임’의 기훈. 넷플릭스에서 글로벌 인기 드라마 1위를 기록하며 흥행 신화를 기록하고 있는 오징어게임의 이 대사를 가져온 이유가 있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처지가 꼭 기훈과 같아서다.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오징어게임 제작진은 제작비의 10~20%를 수익으로 받을 뿐 흥행에 따른 별도의 인센티브를 얻지 못한다. 넷플릭스가 저작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세계에서, 오징어게임은 구독자를 끌어모을 장기 말일뿐이다.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상황이 생기는 건 넷플릭스가 유독 악독해
올 9월 시사IN에서 ‘가장 신뢰하는 언론인’ 순위를 발표했다. 1위는 시사IN이 조사를 시작한 2007년 이후 줄곧 1위를 차지한 손석희 JTBC·JTBC스튜디오 총괄사장이었고, 2위는 국민 MC 유재석이었다. 3위는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였다.시사IN 조사 결과는 우리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살펴볼 만하다. 조사 결과를 보고 들었던 몇 가지 생각을 지면을 빌려 나누고자 한다.첫째, ‘포스트 손석희’는 요원하다. 손석희 사장이 JTBC 뉴스룸에서 하차한 지 1년 반이 지났지만 그를 이을 저
기자협회보의 창립 57주년 기획은 “기자라는 업이 위태롭다”였다.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매년 이맘때 실시하는 여론조사에서 기자들의 직업 만족도는 지난해까지 3년 연속 하락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실시하는 ‘언론인 조사’에서도 언론인 직업 전반에 대한 만족도(11점 척도)는 2013년 6.97점에서 2017년 5.99점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언론인으로서의 비전 부재, 사회적 평가 하락, 낮은 임금과 복지, 과중한 업무 등이 사기 저하 요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기자가 일터를 떠났다.기자협회보 글을 읽고 나서 얼마 후 또 다른 글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는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반지원정대 여정이 등장한다. 등장인물 모두 절대반지를 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를 파괴하긴 쉽지 않았다. 절대반지를 손에 넣은 이들은 여지없이 절대반지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다.누구나 그 고리를 끊어야 하는 걸 알지만, 막상 내 것이 되면 욕심이 생기고 마는 그것.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둘러싼 지난한 논의는 마치 절대반지를 둘러싼 싸움과 같았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주요 담론 중 하나는 ‘공영방송 정상화’였다. 시민들은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을 통해 공영방송의 독립성 확
도쿄 올림픽 3관왕에 오른 양궁 금메달리스트 안산 선수가 ‘페미니스트 논란’에 휩싸였다. 일부 남성 커뮤니티가 안산 선수의 숏컷 머리 스타일과 ‘오조오억’, ‘웅앵웅’ 등 안 선수가 소셜미디어에서 사용했던 몇몇 어휘를 ‘페미니스트의 증거’라며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심지어 ‘페미니스트인 안산 선수의 금메달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러한 황당한 주장은 언론으로 옮겨져 해외까지 수출됐다. 로이터통신이 ‘한국 양궁 선수의 짧은 머리가 반페미니스트 정서를 자극했다’는 제목으로 이 논란을 자세히 다뤘고, 미국 UPI통신과 영국 인디펜던트도 뒤이어 보도했다. BBC는 안산 선수의 페미니스트 논란을 ‘온라인 학대’라 칭했다.
언론엔 두 종류 기사가 있다. 청정 기사와 오염된 기사. 청정 기사는 언론사가 공들여 만든 기사다. 취재도 잘 돼 있고, 맞춤법 틀린 문장도 찾기 어렵다. 취재와 기사 생성까지 들인 시간도 길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언론사에 입사해 잘 훈련 받은 기자가 쓴 글인 데다가 데스크가 크로스체크까지 해서 내보내기 때문에 읽을 만하다. 자랑할 만한 기사이므로 바이라인도 제대로 달려있고, 지면으로도 옮겨져 더 정제된 언어로 독자에게 읽힌다.오염된 기사는 조회수용 기사다. 클릭 수에 따른 광고 수익을 끌어 모으려는 ‘쩐의 논리’에 오염된 기사다
사과 상자로 인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업이 사과 상자에 돈을 두둑이 넣어두고 핵심 권력층을 찾아가면, 이는 단연 최고로 정중한 인사였다. 압권은 1991년 세계일보 이용식 기자의 특종으로 알려진 수서 비리다. 수서지구는 무주택 서민에게 분양될 땅이었지만,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로비로 정 회장과 결탁한 택지조합에 ‘특혜분양’으로 넘어갔다. 당시 정 회장은 이 특혜분양을 성사시키기 위해 수백억이 넘는 돈을 사과 상자에 나눠 남아 정·관계 실세에게 뿌렸다. “아주 특별한 사과니까 잘 드십시오”라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였다.이 과정엔 여
“역사의 증거를 충실하게 기록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일입니다”작년 7월, 뉴욕타임스의 연구·개발 조직인 R&D랩이 3차원 시각화와 웹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스토리텔링 기법을 소개했다. 이른바 ‘입체 저널리즘’이다. 뉴욕타임스는 2019년 9월1일 바하마 군도에 있는 아바코섬을 강타한 허리케인 도리안의 여파를 이 기법을 활용해 기록했다. 초강력 허리케인이 불어닥친 후, 아이티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샌드뱅크 지역은 돌만 굴러다니는 폐허가 됐다. 집들이 무너져 내렸고, 침수된 자동차들은 길가에 널브러졌다. 길바닥에 놓여있는 한 아이의 졸업
근거조차 없는, 주장만 남은 의견들이 미디어를 잠식하고 있는 시대다. 유튜브엔 선동가들이 넘쳐나고, 언론도 이런 시류에 편승해 정파적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 시기에 함께 읽고 싶은 두 편의 좋은 글이 있어 지면을 빌려 소개하고자 한다. 월간 신문과방송에 실린 남재일 경북대 교수의 ‘허술한 객관주의보다 진실 추구하는 의견이 백배 낫다’란 글과 안수찬 세명대 교수의 ‘의견 넘쳐나는 시대의 기자 임무는 사실 발굴과 검증 통한 진실 추구에 있어’란 글이다. 의견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한쪽은 ‘충실한 의견’을, 또 한쪽은 의견보다는 기
“같은 죽음. 다른 관심. 300kg 쇳덩이에 깔려.. 눈 감지 못한 청년 노동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지난 4월 새 두 청년 죽음이 있었다. 평택항 항만 부두에서 작업하다 300kg 무게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4월22일 숨진 23살 이선호씨와 서울 반포 한강공원에서 4월24일 실종돼 닷새 만에 숨진 채 발견된 22살 손정민씨다.죽음 경중을 따질 수 없을진대, 두 청년에 대한 세상 관심은 달랐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빅카인즈를 이용해 지난 한 달간 53개 매체 보도 건수를 집계한 결과, 손
“우리가 그런 기사를 써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 자기들이 먼저 써놓고는 기사를 가지고 와서 우리가 이렇게 예쁘게 아름답게 기사를 써줬으니 광고비를 내놔라 이런다, 어이가 없는데 우리도 안 줄 도리가 없다”삼성 일가가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산 26조원에 대한 상속세 납부와 기부 계획을 밝혔다. 이에 대한 언론 반응은 뜨거웠다. ‘이건희의 마지막 선물’부터, “‘이 회장 고마워요’ 한마디는 해야”란 표현까지 등장하며 칭찬 일색 기사를 쏟아냈다. 상속세를 제외하면 실제 기부액은 재산의 15% 내외 수준임에도, ‘60% 사회환
죽음이 새로운 활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씨앗이 될 수 있을까? 시장경제에선 가능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노키아’다. 노키아는 1998년 세계 1위 휴대전화 회사였으나 스마트폰 혁명으로 몰락했다. GDP의 4%를 차지하던 노키아의 추락으로, 핀란드는 수년 전 경제 전체가 출렁이는 위기를 경험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노키아가 망한 덕분에 핀란드 경제는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노키아가 1만 5,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퇴직‧연구개발 인력들을 중심으로 300개 이상의 새로운 기업이 탄생했다. 앵그리버드 게임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거리가 못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그것은 뉴스거리가 된다.” 수업에서 ‘뉴스란 무엇인가’를 배울 때 교수에게 들었던 얘기다.‘선’의 편집장이었던 찰스 데이나가 한 말이라는데, 뉴스가 되려면 사람의 관심을 끌거나 충격적 사건을 포함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개가 사람을 무는 것과 같은 일상적 일은 뉴스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기사가 출고되자마자 곧바로 조회수로 평가받는 지금과 같은 시대엔 이 저널리즘 경구가 더 엄격히 적용된다. 지난 4월11일 오후 8시 기준으로 한 언론사의 가장 많이 본 뉴스는 ‘세제 수
“공포를 최소화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화할 것인가” 프랭크 푸레디는 저서 ‘공포 정치’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두 가지 선택지에서, 정치인들은 공포와 정치를 한 세트로 만들고자 하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예로부터 공포는 인류의 생존 확률을 높여왔던 정서였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고, 또 ‘파충류의 뇌’라고 불릴 정도로 원초적 감정인 만큼 공포는 매력적인 정치 자원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당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함이요’란 메시지는 그 어느 말보다 강력하고 단순하다. 정치인들은 이 정치적 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때때로 일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