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4월 28일은 내 기억에 굉장히 무더운 날이었다. 4월임에도 불구하고 한여름처럼 굉장히 무더웠던 것 같다. 일 년 전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 이후로 지내온 시간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땅 같은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세상을 떠난 두 친구의 부모님은 소리 없이 동네를 떠났다.사람들과의 대화가 줄었고, 모든 일에 의욕이 생기지 않아 한
4월 16일로부터 175일 째 되는 10월 7일 오전, 나는 광화문 단식 농성장 천막에 앉아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가 실린 조간신문을 보고 있었다. 세월호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해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 빈약한 수사 내용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비수처럼 찌르는 대목이 하나 있었다.결코 새로운 뉴스는 아니었지만, 내막이 그러려니 짐작하던 그대로가 검찰
영화인인 저는 27살입니다. 어떻게 보면 어리다 할 수 있겠고, 좋게 말하자면 젊다고도, 좀 비틀어서는 그 나이면 이제 좀 알 만하겠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글쎄요, 상대적이겠죠.저는 결혼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아이도 낳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유가족을 이해한다는 말은 거짓일 것입니다. 공감한다고 아무리 생각한들 단 1%도 못 미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서 12장 15절)느닷없이 이 성경구절이 떠오르는 것은 내가 특별한 신앙인이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덧 익숙해진 광화문광장에서의 시간이 던져준 화두여서는 더욱 더 아니다. 다만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 人之常情의 상념에 빠져 이리저리 뒤척이다 새벽녘에 생각난 글귀다.그들도
노란리본을 소일삼아 천막을 지키는 동안 지나는 ‘어떤’ 이들을 마주칩니다.억울한 게 많다며 알리고 싶다는 어떤 성형 여인, 쯧쯧쯧 혀를 차며 지나가는 할아버지, 단식하는 동안 유일한 음식인 물을 그냥 집어가는 어떤 할아버지, 10대 아들 손을 잡고 수고 많다며 천막마다 인사를 하고 다니시는 어떤 아버지, 수원부터 걸어왔노라는 노란 티셔
광장은 햇살로 가득했습니다.각 종교단체와 민간단체에서 자원해서 나온 봉사단원들은 행인들의 발걸음을 잠시라도 늦추고자 호소하였습니다. 막사 안 단체장들의 단식 투쟁은 벌써 25~30일을 넘어섰고, 그들은 스쳐가는 행인의 슬픔조각을 받아먹으며 허기진 배를 달래는 듯 했습니다.세종대왕 동상 너머 뵈는 푸른 지붕은 한창 숨바꼭질에 심취하는 중입니다.‘너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좋은 체험이었습니다. 잠들기 전의 공복이 좀 힘들었고, 아침 되니까 괜찮았는데..... 좀 있으면 밥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더 배고파지는 정도였습니다.단식에 참가하는 것,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습니다. '의지'는 있어도 '시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동조단식장에서 정윤섭 작가가 보고 느낀 정청래 의원
어느 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는 다짜고짜 인터넷 기사에 댓글 같은 거 함부로 달지 마라, 요즘 같은 세상에 댓글을 함부로 달다가는 잡혀간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퍼부었다.엄마가 이렇게 나에게 전화를 한 이유는 내가 가족과 공유하는 SNS에 세월호 관련 기사 하나를 링크 걸어 게시한 적이 있었는데, 이 글을 보고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맙소
4월16일 그날의 상처이후 벌써 5개월이 다 되었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지났음에도 해결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는 곪고 아픔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사건 발생 초기, 이 상처가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이렇게 깊어 질 줄 생각 못했습니다. 대통령의 말처럼 특별법이 금세 만들어 지고 명백하게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조금은 있
도저히 마음이 붙잡히는 걸 어쩔 수 없었다.“나 형님 집에 안 가면 안 되는 거겠지?”내가 쭈뼛거리자 아내는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차렸다.“내가 애들 데리고 갔다 올게. 당신 마음 가는대로 해.”그렇게 해서 추석 하루 전인 9월 7일, 나는 광화문의 영화인 단식 천막에 앉아 있게 되었다.추석 연휴가 닷새였다. 생때
(이 글은 세월호에서 타고 있었던 희생자의 시점에서 현재를 비춰본 영화감독의 이야기입니다. 실제 희생자의 이름이 아닌 까닭을 독자들이 헤아리시리라 믿습니다.)해수는 지금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나가야 할 것 같은데 방송에서는 그냥 있으라고 합니다. 그냥 있으라니... 믿어야지요. 어른들의 말씀이니....배가 많이 기울어졌습니다. 이제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바라는 영화인 동조단식에 함께 한 성결대학교 연극영화학부 학생들이 24시간 동안 광화문 광장에서 리본을 만들고, 서명을 받고, 피켓팅을 하고, 촛불문화제에 참여하며 겪고 느낀 마음들을 보내왔습니다. 이들이 광장에 선 것은 하루였지만, 여기에 오기까지는 4월 16일부터 지금까지 줄곧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해온 봄부터 가을까지의 긴긴 시간이
한 달쯤 전, 아마도 8월 중순에, 아는 분을 만나기 위해 잠시 광화문 농성장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납니다. 분수대를 주변으로 꼬마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풍경들 뒤편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천막들, 그 사이에 무엇을 감시하려는지 군데군데 서 있는 경찰들. 제가 만났던 분은 그 곳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고, 유가족들이 단식 과정에서 하나 둘 탈진하시는
어느덧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새벽녘, 자동차가 광화문 도로를 질주해 갈 때 마다 단식 농성장 천막의 비닐가림막이 요동을 칩니다. 누워있으면 땅이 울리고 귀가 멍멍합니다. 단식자들도 밤에는 잠을 자야하지만 결코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배고픔과 소음, 더위와 근육통증에 단 하루의 단식참여도 이래저래 힘이 듭니다.그런데, 유민아빠 김영오님은 무려 4
생각해보니 몇 년 동안 광화문 광장엘 간 적이 없었다. 집도 사무실도 그쪽과는 전혀 연이 없으니 당연한 거였겠고, 거기서 데이트할 것도, 친구와 약속 잡을 것도 아니니 당연한 거였겠지. 광화문이 광장으로 바뀐 것도 벌써 몇 년 전인데 지척에 두고도 발길조차 하지 않았던 이곳에 처음 오게 된 건 8월 15일, 교황 방문 때였다. 천주교 신자였지만 일 년 동안
"아빠가 왜 거기 있어?"11시까지 광화문에 도착하기 위해 일찍 나오느라 자고 있는 딸을 깨우지 않았었다. 종각에서 광화문 광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던 나는 딸의 전화를 받고 잠시 머뭇거렸다. 집을 나서는 나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쳐다보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그저 말 그대로 관심만 가졌던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더 이상은 한 발짝 떨어져서
추석 연휴의 첫 번째 날, 광화문 세월호 영화인 동조단식에 참석했다. 세월호 사건 이후 첫 번째 명절이라 함께 하는 분들이 적을까봐 신청한 것인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있었다.처음 인사를 나누거나 이름만 들었던 분들이라 어색했지만 내 낯가림이 무색하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함께 하는 리본 만들기 덕분에 몸이 분주하고, 즐거운 수다에 마음이 분주하여 작렬하
지금 난 여기 왜 있는가?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난 한동안 멘붕이었다. 나 뿐 만이 아니라 아마 우리 대부분이 그랬을 것이다. 4월 16일 오전 11시에 나는 TV를 보고 있었다. 전원 구조라는 소식이 12시쯤 이었나?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들 한바탕 해프닝이었던 것처럼 미소를 띠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구조소식을 기다리던 유가족들이 자리에 주저앉는 모습이
어제의 광화문 광장에서의 짧은 시간은 내게 마치 한편의 에세이 필름같이 느껴졌다. 시간적으로는 나의 오늘 이라는 실재이지만, 광장에 설치된 모니터 화면 속에 반복재생 되고 있던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은 지난날의 죽음에 대한 재현이었다. 공간적으로는 사람들이 단식하고 있던 텐트가 중심이었지만, 이 단식에 반대하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한 사운드가 주변을 가득